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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광주리ㆍ그 후
임철순 2007년 01월 23일 (화) 16:34:00
30여년 만에 내 책을 돌려 받고 30여년 만에 남의 책을 돌려준 이야기를 <빈 광주리>라는 글로 쓴 것이 지난해 11월 13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쯤 더 지나 그 글에 등장하는 대학서클 여후배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뒤늦게 내 글을 읽었다는 그녀는 “형이 나한테 준 책이 있는데 생각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니 내가 무슨 책을 주었어?”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 봐요, 형은 인간은 돌려 받을 것만 기억하고 돌려줄 것은 잊어 버린다고 썼지만 남에게 주고도 잊어버린 것도 있잖아” 그러더군요. 무슨 책이냐고 물었더니 헤르만 글라서의 <20세기 문학의 반역>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자 그녀가 나에게 준 책도 있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집에 들어가 살펴 보니 박찬기(전 고려대 교수)의 <독일문학사>인데, 책 뒤에 서명과 함께 ‘언제나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시길 빌며. 1973.11.11’이라고 씌어 있더군요. 내가 대학 졸업을 3개월 정도 앞둔 4학년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왜 책을 주고 받았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 날 그녀는 책을 가지고 나왔지만, 나는 <독일문학사>를 가지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내 책을 빌려달라고 했더니 가지라고 선선히 돌려주더군요. 1964년 탐구당 발행, 정가 300원. 독일어 원제는 <현대 세계문학소사> 쯤 되는데 이동승(전 서울대 교수)씨가 번역을 하면서 <20세기 문학의 반역>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 책에는 꽤나 열심히 읽은 것처럼 페이지마다 밑줄이 많이 쳐져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준다는 말은 없이 내 이름만 적혀 있었고, 무슨 이유에선지 몰라도 월간 <현대문학>에서 오린 것으로 보이는 동요 <따오기>의 작사자 한정동의 사진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녀가 내게 준 책은 독문과 학생의 필수교과서나 마찬가지였지요. 졸업이 다가올 때까지 책도 없이 엉터리로 살다가 선물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책을 준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점 심을 먹으면서 나는 사위를 본 기분이 어떠냐, 요즘은 그림을 안 그리느냐 그런 걸 물었고, 명리학을 공부한다는 그녀는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묻더니 사주를 풀이해 주더군요. 헤어질 무렵에는 30대가 애인이 있으면 패가망신, 50대가 애인이 있으면 가문의 영광, 60대가 애인이 있으면 신의 은총…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에 선 채로, 그런 이야기를 잔뜩 써놓은 수첩을 조금씩 보여 주면서 강아지와 남편의 같은 점과 다른 점, 그런 이야기를 계속 했습니다. 처음 듣는 게 많았습니다.

원 래 활달하긴 했지만 내년이면 외손주를 볼지도 모르는 여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나는 참 재미있었습니다. 깔깔거리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에 30여년 전 여대생시절의 얼굴이 겹쳐서 보였습니다. 세월은 참 묘하고 용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녀와 헤어져 돌아오면서 삶의 광주리에는 좋은 글과 책만 담으려 할 게 아니구나, 이런 유머와 여유도 담아야 하겠구나, 도라지나 산삼 구슬만이 전부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울러, 책이든 무엇이든 집에 있는 것 중에서 원래 내 것인 것과 내 것이 아닌 게 무언지 챙겨 보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 뒤, 수첩에 적혀 있는 그 EDPS(음담패설)와 유머를 이메일로 보내라고 했지만 그녀는 무엇이 그리 아까운지 딱 한 번 답장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그 날 알려준 맛소금 3행시를 소개할까요? 맛, 맛도 없는 게 소, 소리만 지르고 금, 금방… (에이, 아무래도 쓰지 않는 게 낫겠네. 각자 알아맞혀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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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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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XXX.XXX.129)
"삶의 광주리에는 좋은 글과 책만 담으려 할 게 아니구나, 유머와 여유도 담아야 하겠구나" 마음에 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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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8 20: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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