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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신아연 2009년 04월 21일 (화) 09:22:15
놀랍게도 며칠 전 꿈에서 박 완서 선생을 뵈었습니다. 평소 선생의 글을 좋아해서 작품을 샅샅이 찾아 읽다보니 글마다 녹아있는 그 분의 가족사를 마치 일가붙이 이야기인 양 줄줄 외우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모양으로 가족과 시대의 아픔을 형상화하는 소설과 산문을 오랜 세월 접하는 동안 어떤 때는 그 분과 제가 원래 친척인데 그 사실을 저만 알고 그 분은 모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런 분을 꿈에서 만났으니 어찌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그것도 그저 만난 정도가 아니라 제 글과 책을 보여드리고 칭찬까지 받았으니 어찌 감히 꿈에서라도 언감생심 꿈꿔볼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기사 전혀 느닷없고 뜬금없이 불쑥 대작가를 꿈 속에서 만난 것은 사실 아닙니다. 평소 한국책을 빌려보던 도서 대여점에서 그 날 낮에 전화가 왔더랬습니다. 최근에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 되었는데 인계인수를 하는 김에 평소 갖고 싶어하던 박 완서씨의 산문집 한 권을 제게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든 가게를 그만둘 때 그 책을 제게 팔라는 부탁을 한 게 엊그제인데 며칠 후에 정말 그런 일이 생긴 겁니다.

하루를 보내면서 의식할 새도 없이 언뜻 스쳐지나가는 사물, 털옷의 보푸라기처럼 일상에서 미미하게 벗어난 상태나 미세한 움직임, 아주 작은 에피소드에도 해진 소맷자락의 실오라기를 풀어내듯 스토리에 스토리를 이어가며 꿈을 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제게 그 일은 그 날 밤 꿈을 위한 어마어마한 컨텐츠를 제공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박 완서 선생의 산문집을 가져가라는 말 한마디에 그만 꿈속을 내처 달려 선생을 직접 만나뵙게 된 것입니다.

수학시험 보는 날 모르고 디립다 영어 공부를 해가서 낭패를 보거나 산더미같은 이삿짐을 싸고 푸는 유의 심난하고 속시끄러운 꿈을 주로 꾸는 제게 한국의 대작가를 만난 꿈은 아무리 꿈이라지만 분명 횡재였습니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다음 날 달콤한 꿈에서 깨고 났을 때의 허망함과 아쉬움, 며칠 후의 쌉쌀한 여운마저 핥듯이 알뜰하게 즐길 때까지는 좋았는데, 시간이 얼마간 지나자 허탈하고 당황스런 마음이 스미는 것은 왜였을까요.
선생의 소설 중에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라는 제목처럼 ‘내가 지금 몇 살인데 아직도 그런 꿈을 꾸는가’ 싶어서 철없는 내면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고 고약스럽기도 했습니다.
정직하게 느낌대로 말하자면 선생을 만난 ‘꿈’이 잠복해 있던 제 ‘꿈’을 건드린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더이상 ‘꿈’과 짝을 이루는 말을 찾아 ‘희망’ 혹은 ‘낭만’으로 선긋기를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니 그 꿈을 가지고 좋아라할 일이 아니라 황당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한국에서 기자 생활을 할 때 인터뷰 요청 건으로 선생과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20대의 끄트머리를 지나고 있던 저는 그 때 선생에 대한 선망과 존경, 부푼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어 전화상인데도 말조차 더듬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호주로 이민와서 내 이름으로 된 칼럼집을 냈을 때 선생에게 그 책을 보여드리고 싶은 들뜬 열망으로 기자 시절에 보관하고 있던 주소를 재차 확인하고 우체국으로 냅다 달려간 일도 있습니다. 용기가 없어 막상 부치지는 못했지만 그때 저는 30대 중반이었고 아마도 아직은 꿈을 꿀 수 있는 나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저는 40대 중후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누구를 만나도 가슴이 뛰는 일도 없고 정말이지 코 앞에 선생이 나타나면 모를까,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풀무질을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시쳇말로 꿈을 잃은 인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뭐 그렇다고 인생의 무상과 허무에 겨워 밤을 뒤채는 일은 없습니다.남과 비교하는 일도 이제는 피곤해졌고, 현재 가진 것으로는 승산이 없기에 경쟁에서도 밀려나 버렸습니다. 그러니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현실에서나마 대박이 나기를 안달하는 속속들이 속물도 못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금의 저를 살아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힘에 이끌려 삶을 꾸려가고 있는 것일까요. 현실에서건 이상에서건 쪽박도 대박도 아니 바란다면 숨만 쉰다고 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박 선생을 만난 꿈을 며칠 되뇌며 어쩌면 그 꿈은 제 풀에 지친 제 의식을 깨우기 위한 무의식의 작용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직도 꿈꾸어도 된다’는, ‘꿈꾸고 싶다’는 내면의 속삭임 내지 본래 제 목소리 같은 것 말입니다.

   




신 아연 :ayounshin@hotmail.com
신 아연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나왔다.
16년째 호주에 살면서 <호주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지금은 한국의 신문, 잡지, 인터넷 사이트,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민 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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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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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123.XXX.XXX.28)
감사합니다. 저도 아마 평생 꿈꾸며 살 것 같습니다.그리하여 맘과 정신이 예쁘고 젊은 할머니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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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3 10: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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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123.XXX.XXX.28)
이 칼럼은 어른들께서 많이 보신다는 걸 잘 알고 있던터라 좀 혼날 줄 알았습니다.^^함께 글을 쓰시는 분의 친구분은 85세에 박사학위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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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3 10:4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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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123.XXX.XXX.28)
인간은 꿈꾸며 사는 동물이지요. 저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람은 단 한순간도 꿈과 희망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도록 애초 프로그래밍 되어진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꿈은 소설을 쓰는 것이죠.. 박완서 선생같은 소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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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3 10:4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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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123.XXX.XXX.28)
비교할 필요가 없는 꿈, 이게 진짜 꿈이겠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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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3 10: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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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소영 (123.XXX.XXX.105)
안녕하세요? 아연씨!
시드니에 오시고 나서 더욱 잘 나가시는 것 같아요!모든 것이 행복하고 다 잘 되어 나가는 것 같아서 축하 드리고 집니다, 타운스빌에서 시드니로 오셨을 때는 나름대로 큰 결정하고 하고 오셨을 텐데,,제 느낌에는 잘 하신것 같아 다행에요, 더욱 행복하시고 더욱 잘 나가실 빌께요,,사실 우리 나이 그렇게 많은 것 아니 거든요..그러니 지금도 항상 청춘이라 생각하셔도 된다고 생각해요??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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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2 19: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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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99)
젊음은 자신의 정신안에 있지, 겉보기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70,80대에 새로운 일에 도전 한다고 나무날 사람도 없을 것 입니다.
환갑을 두 해 전에 보내고 지금은 외손녀를 돌보느라 독서도 맘껏 할 수 없지만,
저는 언제나 꿈꾸고 그 무엇인가가 되려는 희망 품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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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1 23:3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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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자 (118.XXX.XXX.14)
더이상 ‘꿈’과 짝을 이루는 말을 찾아 ‘희망’ 혹은 ‘낭만’으로 선긋기를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니요? 제 나이 정도 되면 정말 살 맛 안나겠네요...ㅎㅎㅎ...육 팔 청춘이구만요..
팔팔하면서도 꿈까지 꿀 수 있고 해학이 넘치는 분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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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1 21: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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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us (121.XXX.XXX.154)
선생님 글도 좋은데요! 그분 글을 아직 접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그 분을 꿈꾸신 건 작가의 꿈을 아직 놓지않고 계신다는 말이 아닙니까. 선생님의 작가에 대한 꿈은 착실히 진행중에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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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1 17: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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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임 (210.XXX.XXX.75)
아연님 안녕하시죠?
ㅋㅋ 이 나이에라뇨? 꿈은 어떤 나이에도 꿀수있다고 생각함다.

글구 우린 이제 어쩜 90~100세를 살아야 하는 세대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이 남았을지도 몰라요 ㅎㅎ
박완서님의 꿈을 계기로 가슴 저편에 묻어둔 뭔가가 있다면 꺼내보시지요.
암튼 아연님의 간절한 소망이 뭔지 모르지만 그 소망들이 하나하나 꼭
이루어지길 바래요~~~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건강 조심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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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1 10:3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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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철 (220.XXX.XXX.215)
저도 근래에는 꿈을 잃은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지만, 꿈을 잃지 않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젠 비교할 필요가 없는 꿈을 꾸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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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1 10: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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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석 (123.XXX.XXX.28)
크리스찬리뷰에 글을 쓰고 있는 윤재석입니다.



자유칼럼에 쓰시는 글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박완서 선생 관련 칼럼은 와닿는 얘기네요.

저도 미국에서 몇 례 생활하면서 비슷한 체험을 한 바 있거든요.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윤재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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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1 1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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