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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두 열 알이 지켜준 행복
유종필 2007년 02월 07일 (수) 11:09:30

지난 2월 4일은 우리 집에 희비가 두 번이나 엇갈린 하루였다. 둘째이자 막내인 중3 짜리 아들이 서울시 복싱 신인왕대회에서 중등부 금메달을 차지하여 온가족이 오후 내내 들뜬 분위기였다.

아들은 몇 달 전 스스로 동네 복싱 체육관에 등록하여 주로 늦은 밤에 운동을 하곤 했다. 내가 종합격투기 애호가라서 늘 함께 심야까지 TV에서 K-1이나 복싱 명승부전을 보았던 것이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지,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진득하게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얼마 전에는 운동에 별 취미가 없는 고1 짜리 형을 복싱에 끌어들이기 까지 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신인왕대회에 출전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내심 놀라면서 출전만으로도 아들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것이 급기야는 금메달으로 이어졌으니 집안에 경사라면 경사인 셈이다.

작은 성취라도 성취의 경험은 값진 것이다. 오랜만에 온가족이 응원을 나갔던 보람을 만끽했다. 비록 올림픽은 아니지만 둘째가 따낸 금메달을 온가족이 번갈아 만져보고 벙실벙실 웃으면서 사진도 함께 찍고 난리가 아니었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다. 행복한 순간이었다.

행복과 불행을 관장하는 여신은 변덕쟁이인가? 우리 가정의 그 조그마한 행복을 현장에서 짓밟아버린 사건이 곧바로 발생하고 말았으니, 그것은 바로 카메라 가방 분실 사건이었다.

기념사진 촬영을 마치고 막 체육관을 나서는 순간 카메라 담당인 큰 아들이 “아 참! 카메라 가방!!”이라고 외쳤다. 승리에 들뜬 나머지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 생각난 것이다. 가방 속에는 엊그제 새로 산 카메라의 잭을 비롯한 온갖 부속기기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온가족이 다시 뛰어 들어가 그것을 놓아두었던 곳부터 시작해서 체육관 여기저기를 다 뒤지고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순식간에 승리의 기쁨은 사라지고 잃어버린 가방 생각 때문에 집으로 향하는 승용차 안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나는 우리 아들들이 평소 새로 산 물건을 잘 망가뜨리거나 잃어버리는 데 대해서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카메라만 해도 멀쩡한 것을 고장 내서 겨우 고쳐놓았는데 또 고장이 났다.  거액을 내고 수리하느니 차라리 새 것 사는 것이 낫다고 해서 새로 산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부속기기들을 잃어버렸으니 나로서는 화가 날 만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엄중하게 경고하고 나서 한 마디를 던졌다. “카메라 본체도 언제 절단내버릴지, 몇 날이나 갈지 모르겠다.” 나의 이 말이 성질 급한 큰 아들을 자극했는지 아들놈은 거세게 치고 나왔다. “촬영을 하기 위해 카메라 가방을 한 쪽에 놓아둔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인가요? 가져간 놈이 잘못이지 놔둔 사람이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과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말투는 거칠어서 나의 기분을 건드렸다. 큰 놈은 말미에 “카메라고 뭐고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다”고 까지 말했다.

그 어떤 분의 말이 생각났다. ‘이거 막가자는 겁니까?’ 아들놈이 카메라를 내던지기 전에 빼앗아서 내 손으로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순간 나를 지배했다. 운전을 하던 아내가 말린다고 끼어들더니 도리어 싸움에 기름을 붓고 말았다.

이 때 금메달을 딴 둘째 아들이 어른스럽게 한 마디 했다. “우승하면 체육관 회비 평생 면제해 준다고 했으니 그 돈으로 가방을 사면되잖아요? 이제 그만들 하세요.” 나는 둘째놈 보기가 부끄럽기도 하거니와 금메달 기분을 망치는 것이 미안하기도 해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꽉~ 꽉~ 누르면서 눈을 감았다.

우리 집안의 부끄러운 에피소드를 굳이 공개하는 것은 뼈아픈 교훈을 되새김과 아울러 다음 이야기를 꺼내기 위함이다. 집으로 향하는 차 안은 고요해졌다. 나는 어느 새 잠이 들었는지 덜컥 하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한성’이라는 만두집이었다. 과천에서 양재 인터체인지 가는 길에 있는 식당이다. 몇 년 전 우연히 들렀다가 만두 맛에 반하여 지나는 길에 가끔 들르곤 하는 집이다. 아내가 만두전골을 시켰으나 예전엔 그렇게 맛있던 음식이 그저 그렇게만 느껴졌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와는 달리 아들들은 맛있게 먹는 눈치였다. 얘들은 얘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럭저럭 다 먹을 무렵 나는 만둣국을 사가지고 가자고 했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별 뜻 없이 던진 말이다. 아내는 만둣국 2인분을 싸달라고 주문하면서 아이들에게 더 먹고 싶으냐고 묻고 접시만두를 1인분 추가했다. 잠시 후 접시만두가 나왔다.

이 때 아내가 여종업원에게 물었다. “만두 1인분이 몇 개예요?” 나는 웬 뚱딴지같은 질문인가 의아해 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접시만두는 열한 개고 만둣국은 열 개예요.” 순간 전혀 예상 못 했던 아내의 한 마디가 나왔다. “지난번에 만둣국 2인분을 싸가지고 갔는데 만두 알이 열 개밖에 없었거든요.” 1년도 훨씬 지난 과거사를 꺼낸 것이다.

나는 당시의 일이 떠오르면서 그 일 자체보다도 걱정이 앞섰다. ‘이러다 주인과 옥신각신 시비라도 붙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증거도 없는데다 싸움에 능하기는커녕 이런 일은 마음 약한 아내의 스타일이 전혀 아닌데,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가?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상냥한 대답이 나왔다. “아, 그래요? 사장님께 여쭤보겠습니다.” 나도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금방 중년의 여사장님이 와서 말했다. “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죄송합니다. 오늘 만두 열 개를 더 싸드리고 국물도 더 드리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어이구,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여사장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식당을 나와서 집으로 향하는 차 안의 분위기는 확 달라져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금메달을 따가지고 가는 당당한 귀갓길의 분위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 인간은 이처럼 작은 일에 흔들리는 가벼운 존재라는 말인가? 하찮은 가방 하나가 가정의 행복을 깨뜨릴 수도 있고, 작은 만두 열 알이 자칫 깨질 번한 행복을 지켜 줄 수도 있음을 실감한 하루였다.

 
   
 
   
 
 

유종필 : 한국일보, 한겨례신문의 기자를 거쳐 김대중 대통령의 정무비서관을 역임했다. 현재는 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사만평집 <단소리 쓴소리>, 정치유머집 <굿모닝 DJ>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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