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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텃밭
김덕기 2009년 08월 07일 (금) 01:53:03
아내는 집 뒤편 야트막한 곳에 일궈놓은 텃밭에 오이, 고추, 토마토, 상추, 부추, 가지, 고구마를 심고 정성스레 가꾸고 있습니다. 텃밭 주위에는 옥수수와 호박도 심었습니다.

초여름 감자를 캔 자리에는 김장 배추와 무를 심기 위해 비워 두었습니다. 주렁주렁 열린 토마토는 적당히 익어 언제든지 먹을 수 있으며, 고추와 상추, 부추도 싱싱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오이와 호박은 끝물이어서 인지 줄기와 잎이 시들해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번듯한 텃밭이 되었지만 이사 올 때만 해도 칡넝쿨이 우거진 풀밭이었습니다. 아내는 이사한 첫해부터 밭을 일구기 시작했습니다. 틈날 적마다 호미와 비료포대를 들고 밭으로 향했습니다. 서울로 출근하는 바람에 칡뿌리를 캐내고, 풀을 뽑고, 크고 작은 돌을 거둬내는 것까지 거의 아내가 했습니다.

밭 모양이 갖춰진 그해 4월 하순 모종을 사다 심었습니다. 오이, 고추, 상추는 물론이고 피망 파프리카까지 사왔습니다.

모종을 심은 지 사흘 뒤 이상고온 현상을 보이던 날씨가 평년의 기온을 회복했다는 방송이 나왔습니다. 새벽에 텃밭에 나갔던 아내가 모종이 몽땅 얼어 죽었다며 울상을 지으며 돌아왔습니다.

의욕적으로 시작한 첫 농사가 자연의 이치 앞에 무너진 뒤, 노지에는 입하가 지나야 모종을 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텃밭 농사 5년째인 아내는 채소와 작물 심는 때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내는 동이 트기 전 일찌감치 텃밭에 나갑니다. 헐렁한 옷에 편안한 신발, 양손에 호미와 비료 포대를 든 모습이 텃밭을 일구던 때와 별반 다름없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가장 힘든 일이 풀 뽑는 것입니다. ‘농사가 아니고 풀과의 전쟁’이라는 아내의 푸념이 아니더라도, 김을 매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수북하게 자라는 풀 때문에 농사꾼들은 여름 내내 곤욕을 치러야 합니다.

제초제를 뿌리면 수고를 덜 수 있지만, 아내는 우리 가족들이 먹을 것이라며, 손톱에 때가 끼고 엄지와 검지에 굳을 살이 생기는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고집스레 풀을 뽑습니다.

어느새 높게 솟아 오른 해를 등에 지고 땀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아내의 소쿠리에 과채류가 수북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는 새벽에 따온 오이며, 호박이며, 고추를 고릅니다. 흠이 있고 못 생긴 것은 소쿠리에 담아 싱크대 옆에 갖다 놓습니다. 아내와 내가 먹을 것입니다. 잘 생기고 싱싱한 것은 따로 골라 신문지에 싼 뒤 김치냉장고에 넣습니다. 토마토를 따로 담아 놓은 칸에는 어느새 완숙된 붉은 토마토로 가득해 졌습니다.

주말이 가까워 오면 아내의 발걸음은 바빠집니다. 자주 가지 않던 장독대도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합니다. 플라스틱 용기에 된장과 고추장을 담습니다. 가끔은 장아찌도 꺼내 담습니다. 부추를 한 바구니 베다가 대파와 함께 잘 다듬어 놓습니다. 이슬 맺힌 깻잎을 따다 정성스레 다듬어 차곡차곡 쌓아 놓습니다.

가까운 곳으로 시집간 두 딸이 주말이면 외손주들과 함께 집에 옵니다. 집에 오지 않는 주말이면 일요일에 교회에서 모든 가족이 만나곤 합니다.

셋째 딸이 큰 딸과 함께 오겠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아내는 부추전을 해줄 모양입니다. 올해 씨를 뿌린 부추는 가늘고 크지 않지만 부드러워 전을 부치기에는 제격입니다.

점심때가 가까운 시간 두 딸이 한 차로 왔습니다. 아내는 텃밭에서 유기농으로 키운 채소 쌈을 맛있게 먹는 딸과 외손주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해합니다.

아내는 갖가지 과채를 김치냉장고에서 꺼내 똑같이 나누어 놓습니다.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놓은 된장 고추장과 장아찌를 가리키며 조리법과 보관법을 설명합니다. 정성들여 가꾼 텃밭에서 생산된 과채류와 된장, 고추장, 밑반찬을 하나라도 더 싸주고 싶은 아내의 사랑을 스스럼없이 받아가는 딸들이 고마운 모양입니다. 많이 싸준 때문일까, 딸들도 입이 벌어집니다.

은근히 부아가 치밉니다. 어미의 손을 보았으련만 제 어미에게 고맙다는 말 제대로 한마디 안 하는 딸들이 오늘은 밉게 보입니다.

딸들이 돌아가자 김치냉장고가 비었습니다. 흠 있고 못생긴 것들만이 소쿠리에 조금 남아 있을 뿐입니다.

아내는 비어있는 김치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헐렁한 옷에 편안한 신발을 신고 오늘도 이른 시간에 텃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김덕기
경기도 동두천 출생. 한국경제신문, 스포츠서울에서 체육기자, 부장으로 근무하며 많은 국내외 스포츠행사를 취재했으며, 스포츠투데이 축구전문 대기자, 한국축구연구소 사무총장을 역임. 현재 고향 가까운 양주시 남면 한산리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영농의 재미에 흠뻑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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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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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75)
딸아이에게 이 글을 읽게 했더니 딸아이 말이 * 어미가 힘들게 가꾼 무공해 먹거리를 받아 안고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이유 *는 고마워 하면 할 수록 어미가 더더욱 열심히 텃밭에 매달릴 것이 뻔 하므로 차마 그리 할 수 없는 탓이라 합니다.
우리가 부모된 뒤 우리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이 미련한 사랑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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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4 13: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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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102)
늙은 소가 일구는 텃밭에 더 늙은 아비가 무릎으로 기던 산비탈 텃밭..... 우리네 부모는 도농을 가릴 것 없이 자식을 위해서 오체투지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른 자녀가 부모를 위해 무얼 할까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때만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결말을 기대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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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8 01: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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