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 연재칼럼 | 이성낙 이런생각
     
‘수액(水液)대란'이 무섭다
2018년 08월 22일 (수) 00:08:04 이성낙

어린 시절부터 듣던 많은 교훈적 속담(俗談) 중에 “설마가 사람 죽인다”라는 말이 문득문득 생각나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 현실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인가 싶습니다. 아쉽게도 실제로 설마 하다가 ‘큰 변’을 당하는 ‘꼴’을 보아온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사자성어가 지닌 깊은 뜻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힌 ‘서해대교 사고’를 생각하면 의료인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먹먹해지곤 합니다. 2015년 12월 3일 발생한 서해대교 사고는 당시 국내 물류 수송 시스템에 대혼란을 초래한 크나큰 사회적 이슈였습니다. 서해대교에 멋스럽게 조형미를 뽐내며 설치된 ‘72번 케이블’에 낙뢰가 떨어져 발생한 사고였습니다. 그 ‘케이블’ 하나 때문에 무려 3주 동안 국내 물류 시스템이 큰 혼란에 빠졌던 것입니다.

서해대교 사고는 사람으로 치면 허벅지 부위의 큰 혈관 하나가 파열된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출혈로 쇼크 상태에 빠져 응급 시술을 받고 적어도 3~4주 동안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 가장 먼저 취해야 할 응급조치가 출혈 관리입니다. 그리고 출혈 관리를 제대로 하려면 수액을 적절히 공급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수액 공급은 유실된 체내 혈액의 절대량을 일차적으로 대체하는 필수적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필자가 당시 서해대교 사고를 지켜보며 의료 재앙의 가능성, 특히 수액 공급에 따른 대혼란을 떠올린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근래 국내외에서 발생하는 재난을 보면 대형화 추세가 뚜렷하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만 준전시 상황에 가까운 대형 사고가 서울 권역에서 발생한다면, 우리나라 중·대형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료인의 응급 대처 능력은 가히 최상급일 것이라고 봅니다. 항생제를 비롯한 소량의 액상형 주사제나 정제 같은 고체형 의약품을 확보하는 것도 별 문제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상시에는 전국 곳곳에 산재한 약국에 비치된 약을 임시로 ‘현지’에서 쉽게 조달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치료용 수액의 경우는 상황이 달라도 아주 다릅니다. 다양한 진료용 수액 중 가장 많이 쓰이는 생리식염수(일명 링거액)는 다른 약물에 비해 무게도 많이 나가고 부피도 큽니다. 약 3,000병상 규모의 대형 병원 한 곳에서 하루에 보통 3,200~3,500팩(1리터 기준)의 수액을 쓴다고 하니, 서울 권역 내 병원에서 사용하는 전체량의 규모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형 병원에서 이런 양의 수액을 보관하려면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니, 운영비 측면에서 보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작금의 모든 중·대형 병원은 운영비 절감 차원에서 최첨단 유통 기법 중 하나인 ‘맞춤 배송[J.I.T.(Just in time)-delivery] 시스템’을 도입해 약품 재고량의 최소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생리식염수의 경우, 평균 병원 재고량은 고작 3일치에 불과합니다. 아울러 장기 계약에 따라 수액 제조 회사가 각 병원에 적정량을 직접 공급하고 있습니다. 일견 매끄러운 시스템이고, 전혀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대형 재난 사태가 발생하면 수액 소모량이 평상시보다 대폭 늘어날 것입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난 서해대교 사고와 같이 수액 공급 경로에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공급에 큰 차질이 생겨 더 큰 재난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수액 제조 회사들이 한강 이남 지역에 분포해 있어 공급 경로 확보에 큰 어려움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국내 수액 공급 현황(2018년도 2분기 IMS data 기준)을 보면 문제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우리나라의 기초 수액 1년 생산 규모는 약 2억 개 수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수액 제조사는 충청남도 당진(JW중외제약/국내 생산량의 약 43%), 충청북도 오송(CJ헬스케어/국내 생산량의 약 25%) 그리고 경기도 안산(대한약품공업/국내 생산량의 약 31%)에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 수액 총생산량의 56%(서울 28%, 경기도 21%, 인천 7%) 이상을 수도권에서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수도권에서 대형 사고가 발생하고 수액 공급 루트에 문제가 생기면, 큰 의료 재난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국가재난대책본부는 병원에서 필수적으로 준비해야 할 의약 품목과 양을 명시하고 있는데, 그중 한 가지 사례를 보면 약 3,000병상 규모의 대형 병원은 생리식염수 30팩(1리터 기준)을 의무적으로 비치해야 합니다. ‘설마 재난 사태가 오겠느냐’는 행정 당국의 안일한 정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실로 소름 돋는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액 공급 접근성의 이러한 문제점과 관련해, 필자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정부 차원,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재난 대책의 하나로 서울 강북 지역 인근에 ‘응급의약품 비상저장소’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 수액을 비롯한 응급 의약 소모품을 보관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해달라는 것입니다. 행정 당국자는 “설마가 사람 죽인다”는 격언을 마음에 새기고 ‘유비무환’의 지혜로 예기치 않은 사고에 대비해주길 간곡히 바라는 바입니다. '수액대란'이 무서워서입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이 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상업적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