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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숙을 찾아서
임철순 2009년 10월 14일 (수) 01:08:44
한 달 전에 썼던 이경남(李敬南) 시인의 사랑 이야기에 몇 마디를 더 보태고자 합니다. 암으로 사망한 탤런트 장진영씨의 사연과, 올해 80세인 노시인의 사랑을 함께 다룬 <두 사랑 이야기>(9월 8일)는 실상 본인을 만나지 않고 자료에만 의존해서 쓴 글입니다.

그 분의 삶과 사랑이 인상적이어서 글을 쓰긴 했지만, 뭔가 꺼림칙하고 개운치 않은 기분이 가시지 않아 2주 전쯤에 그 분을 찾아서 만났습니다. 만나는 장소를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바람에 한 번은 허탕을 치고 두 번째 약속에서 드디어 만났는데, 전화 목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해 대화가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큰 지장은 없었습니다.

   
  이경남 시인/임철순 촬영  
결론적으로, 그의 삶은 ‘장일숙을 찾아서’라는 말로 요약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장일숙(張一淑)은 6ㆍ25 당시 구월산 반공유격전에서 함께 공산군에 맞서 싸우다 실종된 뒤 다시는 만나지 못한 그의 첫사랑 여인입니다.

황해도 안악의 고향에서 그가 고3, 그녀가 중3일 때 둘 다 공부가 1등인 학생회장으로 만난 두 사람은 첫 눈에 사랑을 느꼈답니다. 그들이 주고받는 연애편지는 그녀의 남동생이 심부름을 했습니다. 6ㆍ25전쟁이 터진 뒤 이씨는 북한 소위로 참전했다가 귀순해 남한 소위가 됐고, 북진하는 유엔군과 함께‘금의환향’해 꿈에도 그리던 그녀를 80여일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그러다가 구월산 유격전의 와중에 영영 헤어지게 된 것은 전에 말한 바와 같습니다.

22세 때인 1951년부터 종전이 될 때까지 2년 반 동안 구월산 반공유격대의 작전참모 참모장 등으로 활약했던 이씨는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과 공산당을 무찔러야 한다는 생각에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백방으로 알아 보고 수소문을 해도 그녀의 자취는 영영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월남한 이씨는 먼저 남한에 와 있던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정훈장교로 군대생활을 하며 장일숙을 애타게 찾았으나 허사였습니다. 1955년 창간된 월간 <현대문학>에 장일숙이라는 이름으로 시를 보내 그 해 9월호, 이듬해 4월호 등 두 번 추천을 받았습니다. 장일숙이라는 이름을 쓴 이유는 그가 나중에 등단시대를 회고하며 쓴 글의 제목 그대로 ‘잃어버린 애인을 찾는 길잡이’(월간 <창조문예> 2008년 5월호)로 삼으려 한 것이지만 장일숙의 연락은 끝내 없었습니다.

   
  10여년 전의 모습  
시인이 되려면 세 번 추천을 받아야 했던 당시, 이씨는 마지막 추천을 앞두고 현대문학사의 권유에 따라 심사위원이었던 박두진 시인을 찾아가 장일숙이라는 이름을 쓴 이유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가 장일숙과 동일인임을 확인한 박두진씨는 이번엔 실제 이름으로 시를 써 보내도록 했고, 1957년 8월호에 이례적으로 한꺼번에 세 편을 추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씨는 그 해에 고향이 같은 김정숙과 결혼했습니다. 안악에 살 때부터 그의 집안, 장일숙의 집안, 김정숙의 집안은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는데, 김정숙의 집안은 1ㆍ4후퇴 때 가족 9명 전원이 월남을 했습니다. 그는 장인과 김정숙에게 장일숙에 대해 미리 설명을 하고 이해를 구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 실종된 장일숙이 이미 사망한 것으로 생각했고, 이씨도 찾기를 포기한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도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군인에서 잡지사 기자로, 신문기자로, 이어 우익 사회단체의 기관장으로 활약해온 반세기 이상의 긴 세월에 이씨는 나이 들고 몸도 늙었지만, 가슴 속의 장일숙은 결코 나이 들지 않았고 죽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모나리자 같았다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미 <자유를 위한 회고록>이라는 자서전을 낸 바 있는 이씨는 요즘, 북한에서 활약했던 구월산 유격대와 남한의 지리산 빨치산을 비교 연구하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그가 앞으로 쓰려 하는 가장 중요한 글은 장일숙을 그리는‘내 영혼의 노래’라고 합니다.

그의 사연이 처음으로 폭 넓게 알려진 것은 본인의 글보다 고은 시인의 <1950년대>라는 책을 통해서입니다. 1973년 초판이 나온 데 이어 32년 만인 2005년에 재출간된 이 책은 1950년대의 풍경, 그 폐허의 문학과 인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고씨는 이씨 등과 매일같이 명동에서 만나 술을 마셨고, 그 때 들은 이야기를 책으로 썼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일일이 적지도 않았다는데, 수많은 문인들의 1950년대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정리한 고은 시인은 역시 대단한 분입니다.

영원히 나이 들지 않는 장일숙은 50여 년 전에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으로 이씨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녀에 관한 유일한 물품입니다. 우표딱지 만큼 작은 그 사진을 이씨는 한껏 확대해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진 이야기를 하면서 이씨는“요즘 더 생각나고 더 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장일숙은 그에게 영원히 빛을 발하는 별입니다. 그가 처음 추천을 받은 작품의 제목도 <별>입니다.

대화 막바지에 “정말 외람된 질문이지만 몸도 하나가 됐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잠시 표정이 어두워진 그는 입맞춤 정도는 했지만 그 이상의 접촉은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때 몸이 섞였더라면 아마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그게 가장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분명 그랬을 것입니다. 둘이 몸까지 하나가 되었더라면 젊은 남녀 사이에 상대를 아끼는 스스러움과 조심스러움이 눅어져 그들은 더 함께, 더 가까이 있었을 것이고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몇 년 전 큰 병을 앓은 이씨는 말을 할 때면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좀 들리고 눈도 귀도 이미 많이 어두워졌습니다. 사랑은 끝없지만 세월은 덧없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말해서 세월은 덧없지만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52년 전 박두진씨가 추천소감에 쓴 대로 장일숙의 존재는 그에게‘잊을 수도, 찾을 수도 없는 한 개 먼 옛 그리운 날의 하늘의 오롯한 별’입니다.

이씨와 헤어져 걸어오면서 이산 김광섭(1906~1977)의 시 <가을이 서럽지 않게>를 생각했습니다. 이 시에도 역시 별이 나옵니다.

하늘에서 하루의 빛을 거두어도
가는 길에 쳐다볼 별이 있으니
떨어지는 잎사귀 아래 묻히기 전에
그대를 찾아 그대 내 사람이리라

긴 시간이 아니어도 한 세상이니
그대 손길이면 내 가슴을 만져
생명의 울림을 새롭게 하리라
내게 그 손을 빌리라 영원히 주라

홀로 한쪽 가슴에 그대를 지니고
한쪽 비인 가슴에 거울 삼으리니
패물(佩物)같은 사랑들이 지나간 상처에
입술을 대이라 가을이 서럽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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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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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우 (188.XXX.XXX.175)
"쏠베이지의 노래"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 애절한 사연도 남북의 이산이 만든 것이겠지요.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 그러나 너무 아픕니다.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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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31 09:40:36
0 0
이용규 (211.XXX.XXX.129)
이경남시인이 찾고잇는 장일숙 사연은 나의마음을 매우 안타깝게 하였습니다. 꿈에라도 꼭...
답변달기
2009-10-15 08:20:33
0 0
김영수 (118.XXX.XXX.158)
<두 사랑 이야기>를 읽고 이경남 시인의 이야기는 미진한 느낌이었는데 직접 찾아뵙고
들으신 이야기를 해주시니 시인의 삶에 존경심이 듬니다.
더욱 남에서 같은 고향의 여인과 결혼한 사연에서도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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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4 17:26:18
0 0
이 중 (211.XXX.XXX.129)
이경남 시인은 한 시절 가깝게 지내던 사이입니다. 참 훌륭한 분입니다. 임 주필께서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주시니 한 시절 시를 쓰던 사람으로 새로운 감동을 맛보게 됩니다. 늘 건강하시고 건필, 부탁 또 부탁드립니다. 이 중 올림.
답변달기
2009-10-14 17:10:52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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