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머리 외국인들의 국궁사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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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머리 외국인들의 국궁사배

황경춘

2009년 11월 06일 (금) 08:25:01

10월 마지막 일요일이었던 25일, 끝없이 맑은 가을하늘 아래 오색의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는 서울 근교의 광릉에서 조선조 제7대 세조대왕의 기신제향(忌辰祭享)이 후손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이사장 李桓儀ㆍ이환의)의 광릉봉향회(光陵奉香會)에 의해 모셔졌습니다. 기신제란 해마다 그 사람의 기일(忌日)에 지내는 제사로, 기제사라고도 말합니다.

얼마 전 조선조 태조의 건원릉을 비롯한 왕릉 40기가 유네스코(UNESCO)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뒤여서인지 이날 행사에는 간소화된 어가행렬까지 등장했고, 많은 내외귀빈들이 참례한 가운데 한 시간여에 걸친 제향이 전통 궁중 제례의식에 따라 엄숙히 진행되었습니다.

제향을 주관한 광릉봉향회 이연창(李演昌) 회장을 비롯한 전주이씨 종친회 여러 주요 인사들이 단정한 예복 차림으로 정렬한 맨 앞줄 바로 뒤에 울긋불긋 다양한 옷차림의 외국인 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옷차림과는 달리 엄숙하고 신기한 표정으로 제향의식의 순서를 지켜보며 의례 중 두 차례 있는 국궁사배(鞠躬四拜) 때엔 집사의 ‘배’(拜) 하는 영(令)에 따라 꿇어 앉아 네 번 절을 올리는 순서까지 따라 했습니다.

마룻바닥에 꿇어앉는 생활풍습에 익숙지 않은 이들로서는 꽤 힘 드는 예법이었지만 주로 노인들로 구성된 이 18명의 외국 손님은 앞줄 종친회원의 움직임에 따라 큰 실수 없이 끝까지 참례했습니다. 몸집이 커 쉬 일어나지 못 하는 사람들은 옆에 있는 한국인이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국제우정의모임(Friendship Force International)의 미국 워싱턴주(州) 올림피아(Olympia) 클럽의 회원들이었습니다. 우정의모임 서울클럽(회장 김화자)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 그들은 일주일 동안 회원 집에서 홈스테이(homestay)를 하며 한국의 역사, 문화, 풍속 등을 배우는 프로그램의 일부로 광릉을 찾은 것입니다.

매년 한두 번 찾아오는 외국인 홈스테이 손님이지만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런 한국 고유 전통 행사와 마주치는 기회는 퍽 드물며, 그런 의미에서 이날의 미국 회원들은 자기네들이 아주 행운아였다고 입을 모아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제례가 끝난 뒤에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부회장이며 서울클럽 고문이기도 한 이건구(李健九)씨가 국궁사배까지 하며 제향에 참례한 이 외국인 일동을 장내에 소개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초헌관인 황사손(皇嗣孫)과 함께 특별히 기념사진까지 찍고 정자각(丁字閣)으로 안내되어 기신제향에 차려진 제상과 제수(祭需)에 대한 설명도 들었습니다.

제를 모시기 위하여, 노란 복장의 취타대(吹打隊)와 붉은 예복으로 단장한 육조판서(六曹判書) 등을 거느리고 소규모 반차행렬(班次行列)의 여(輿)를 타고 정자각 앞으로 이동하는 근엄한 모습의 황사손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미국 손님들은 사진을 함께 찍고 간단한 인사까지 교환할 기회를 가져 무척 감동하는 눈치였습니다.

봉향회에서 마련한 한식 도시락을 맛있게 들며, 이들은 조상을 공경하는 한민족의 아름다운 정신과 몇 번의 국난을 겪으면서도 면면히 이어 온 제향문화의 전통을 부러워하였습니다.

수년 전 5월 첫째 일요일의 종묘대제(宗廟大祭) 때에도 마침 서울을 방문 중인 우정의모임 외국인 회원이 있어 어가행렬과 종묘제례에 초청을 받았지만 그때에는 귀빈석에서 구경만 했을 뿐 실제로 국궁사배를 하는 참례 경험은 해보지 못했었습니다.

서울에 체재하는 동안 올림피아 클럽 회원들은 한국전쟁기념관도 방문하여 한국전에 참전하여 많은 희생자를 낸 미국을 비롯한 16개 참전국의 역사를 되새기고,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기적적으로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대한민국을 다시 보는 기회도 가졌습니다.

이들은 한국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지식은 가지고 오지만,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대로 한국에 대한 인상은 올 때와 갈 때 사이에 큰 차이가 납니다. 물론 개중에는 나쁜 인상을 가지고 떠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긍정적 인상을 가지고 귀국합니다.

외국 언어에 능통하지 못한 회원이 겪는 불편 이상으로 민간외교를 통해 얻는 재미와 보람은 이 홈스테이 경험을 실제로 해보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알게 된 외국인과 인터넷 메일이나 연말연시 카드를 주고받으며 키우는 우정은 인류가 결국은 한 가족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하며 세계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책을 통하거나 학교에서 배우지 않고도 절로 몸에 익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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