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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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아프리카’

임종건

2009년 12월 02일 (수) 00:48:14

세계의 많은 국가 중에서 아프리카와 연관성이 많기로는 미국이 으뜸일 것입니다. 우선 노예제도와 링컨 대통령이 있지요. 아프리카 서부의 나라 라이베리아(자유의 땅)와 수도 먼로비아(미국 5대 제임스 먼로대통령의 이름을 딴 도시)도 있고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 그리고 소설가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도 생각납니다. 그리고 아주 가까이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있지요.

제국주의 시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삼아 갈가리 찢어 차지했고, 아프리카인을 현지에서, 또 본국으로 데려다 노예로 썼습니다. 미국은 식민지 지배에 가담하진 않았지만 아프리카인을 가장 많이 노예로 부린 나라지요.

현재 미국의 흑인은 전체 인구의 13% 정도지만 흑인이 없는 미국은 상상할 수 없죠. 노예의 후손들이 이제는 세계 최강국 국민으로 개성과 능력을 발휘하며 살고 있습니다. 스포츠 연예계는 물론이고,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블랙파워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미국의 흑인들이 아프리카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자신의 현재의 삶과는 무관하다고 여기고 있을까, 아니면 조상의 나라이므로 마음의 고향쯤으로는 느끼고 있을까. 경제발전의 기준점이 되는 2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아프리카, 특히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는 발전이 매우 더디어 거의 정체된 땅으로 남아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아프리카 나라들이 독립했지만 거의 모든 나라에서 내란이 벌어져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경우도 허다하죠. 아프리카를 착취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던 제국주의 세력의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겠지만 해결책이 될 수는 없죠.

물론 서방 식민세력들이 과거 반성 차원에서 아프리카의 발전을 위해 힘을 모았다면 지금보다는 나아졌을 겁니다.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지 통치는 ‘분열시켜 통치하기(Divide and Rule)'가 기조였다고 할 수 있지요. 독립 후의 내전도 거기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죠. 한반도의 분단이 그렇듯이요.

서방국가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을 때 서방국가에 정착한 흑인후예들이라도 나섰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미국의 흑인들 대다수가 자신은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이기 때문에 아프리카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면 아프리카는 앞으로 오랫동안 정체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보는 편입니다. 미국의 위상은 약해지곤 있으나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고, 성공한 흑인들이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케냐 출신의 아버지를 둔 오바마가 마침내 대통령에 오른 나라입니다.

1970년대 중반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가 소설로, 드라마로 전 세계를 휩쓸 때 저는 미국흑인들이 자기의 조상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떠 아프리카 발전의 모멘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미국 흑인들에 의한 아프리카 개척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라이베리아 건국이 바로 그것입니다.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일단의 미국흑인들과 대통령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먼로 등 선각적 백인들이 주축이 돼 19세기 초에 세운 라이베리아는 영국의 흑인들이 세운 시에라레온과 함께 노예제도에 대한 각성의 산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서 볼 수 있듯이 이상의 실현은 아직 멀기만 합니다.

물론 미국이나 유럽지역에서 사는 흑인들이 백인사회로부터의 인종차별을 극복하기만으로도 벅찬 세월을 살았음을 인정해야겠죠. 족보도 없는 아프리카의 조상들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은 많이 사라졌고, 성공한 흑인들도 많아졌지요. 아프리카에 대한 지원노력이 선진사회의 일원이 된 서구의 흑인사회에서부터 시작돼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유태인은 나라를 잃고 2000년 넘게 지구상을 떠돌았지만 조국과 조상을 잊지 않았던 결과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화상(華商)들이 경제대국으로 가는 중국의 첨병이 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민족도 유태인이나 중국인 못지않은 애국애족의 정신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라가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해외 동포들이 보여주는 애국심은 그런 유전인자의 원형일지도 모릅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한국은 여느 아프리카국가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과 똑같이 피식민지 국가였고, 내란을 치른 기아와 빈곤의 땅이었습니다. 이런 극한의 상황을 견뎌내고 오늘의 한국을 이룩한 것은 우리의 핏속에 연면히 흐르는 애족정신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달 24일 한-아프리카포럼에서 서울선언이 채택됐습니다. 이 포럼에선 한국과 아프리카의 공동번영과 천년개발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를 협의했습니다. 서울선언은 2012년까지 아프리카 원조액을 배로 늘리고, 아프리카 연수생 5,000명을 초청하며, 한국의 자원봉사자 1,000명 이상을 파견한다는 게 골자입니다. 저는 이 내용보다 개발 목표연도가 ‘천년’이라니 참으로 넉넉하게도 잡았다고 할까, 암담하다고 할까 헷갈렸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개발을 해내기로 말하면 한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적합한 나라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한국을 ‘희망’으로 삼는 나라가 지구상에 여럿 있지만 아프리카는 대륙 전체가 한국을 ‘희망’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한국은 아마도 아프리카 국가들이 외세의 진출에 대해 제국주의적 의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나라일 겁니다. 이왕 원조를 한다면 산발적인 방법보다, 선택과 집중 방식으로 한국형 정치 경제발전 모델국가를 하나라도 만드는 방안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프리카를 생각할 때면 저는 으레 우리 안에 있는 ‘아프리카’를 생각합니다. 북한입니다. 북한의 정치체제는 ‘추장의 정치’와 다를 바 없고, 경제력은 딱히 아프리카 수준입니다. 한 중 일 3국은 아시아 시대를 주도할 주축입니다. 북한을 최소한 아시아 평균수준의 경제로 편입시켜야 아시아 시대는 정상 가동된다고 봅니다. 선진형 체제에 아프리카형 체제가 박혀있는 한 동북아 불안정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부자 형제 사이에 가난한 형제가 하나 있으면 가족 모두가 불안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가난한 형제일수록 자기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도움만 청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행패를 부립니다. 남한이 형제의 입장에서 도와주려 해도 북한은 핵무기라는 인위적인 장애를 만들어 돕기도 어렵게 됐습니다. 우리 안의 ‘아프리카’는 우리의 정신적 유산인 애족정신을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