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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었을 때 - 『사랑의 풍토』
김이경 2009년 12월 03일 (목) 02:06:10
전화 한 통 없이 잠적했던 후배가 꺼칠한 얼굴로 나타난 순간, 저간의 사정이 짐작되었습니다. 동시에 ‘오기만 해 봐라’ 벼르던 마음은 사라지고 걱정이 앞섰습니다.
“괜찮아?”
“예… 죄송해요.”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 후배는 저와 눈이 마주치자 피식 웃었습니다.
“그렇게 걱정되면 실연당했을 때 읽을 책이나 한 권 주세요.”
평소에도 불시에 처방용 책을 물어서 저를 놀리곤 하던 그였지만, 이날은 웃음으로만 넘길 수 없는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습니다. 다행히 여느 때와는 달리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책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모로아가 쓴 『사랑의 풍토』입니다.

하도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 서점이나 도서관엔 없었지만 인터넷 헌책방이 있어서 그래도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책값 500원에 배송비 2,500원을 주고 주문했더니 이틀 뒤 1977년에 나온 문고판 한 권이 도착했습니다. 책장이 바스러질 만큼 낡은 책이었지만 20여 년 만에 다시 읽은 책은 역시나 제 기억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풍토』는 두 편의 고백으로 이루어진 소설입니다. 1부는 필립 마르스나가 결혼을 앞두고 연인 이자벨르에게 쓴 고백이고, 2부는 결혼 이후 이자벨르가 남편 필립에게 쓴 것입니다. 두 사람은 편지 형식으로 쓴 수기에서 각자 자신이 온 마음을 바친 사랑에 대해 고백합니다. 그 사랑은 안타까울 만큼 어긋나 있지만, 또한 그만큼 서로 닮아 있기도 합니다.

필립이 쓴 1부의 제목은 ‘오딜르’. 그가 목숨처럼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입니다. 진지하고 절도 있는 집안에서 성장한 필립은 자신과는 정반대의 환경에서 자란 오딜르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오딜르의 빼어난 아름다움과 자유로운 영혼에 반한 필립은 그녀와의 완전한 결합을 꿈꿉니다.

그는 오딜르를 “신화적이고 완전한 여신”처럼 숭배하면서도, 자신과 다른 생각, 자신과 다른 취미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딜르가 “지껄이는” 말을 혐오하고 그녀의 처신을 “경박”하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그녀가 가장 사랑스러울 때는 지치고 쇠약해져서 자기 옆에 가만히 있을 때입니다. 그녀가 기운을 차리고 바깥으로 돌기 시작하면 그는 공연한 불안감으로 캐묻습니다.
“오딜르, 두 시와 세 시 사이에 뭘 했소?”
필립의 사랑을 아는 오딜르는 말합니다.
“저는 당신을 퍽 사랑해요. 하지만 조심하세요. 저는 자존심이 강하니까요.… 제가 잘못일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있는 그대로의 저를 받아줘야 해요.”

사랑에 빠진 사람이 연인을 위해 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일 겁니다. 특히나 필립처럼 상대를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숙제이지요.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여신 오딜르를 잡기 위해 매달리는 사이, 그의 사랑은 집착이 되고 맙니다.

세상 많은 일이 그렇듯 사랑도 불공평합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도 더 많이 사랑하는 쪽과 사랑을 받는 쪽이 있어서, 한쪽은 늘 애가 타고 한쪽은 늘 숨이 막힙니다. 사랑하는데도, 아니 사랑하기 때문에 불행한 역설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하지만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더 많이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딜르를 사랑하여 기꺼이 그녀의 노예이기를 자처한 필립은, 자신의 헌신적인 사랑이 사실은 이기적인 만족감임을 확인합니다.

“오딜르 앞에서가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하면 오딜르에 대한 내 사랑 앞에서, 내 자존심을 이겨내고 나 자신을 낮추었을 때 나는 더욱 자신에게 만족을 느꼈던 것이다.”

필립은 오딜르를 향한 열망이, 사실은 “오딜르의 마음을 지배하고픈” 은밀한 자만심의 발로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오딜르를 잃은 뒤 깊은 절망에 빠진 자신을 돌아보며, “나는 내 슬픔을 사랑했던 것”이라고 회억(回憶)합니다. 헌신이라고 믿었던 사랑이 어쩌면 상대를 지우고 자신을 세우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확인하면서 필립은 절망합니다. 사랑이 대체 무엇인지, 자신이 참된 사랑을 할 수 있을지, 그는 자신이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필립의 갈망과 절망은 그의 두 번째 아내 이자벨르에게서 고스란히 되풀이됩니다. 마치 역할 바꾸기 놀이처럼, 이번엔 오딜르 역을 필립이, 필립 역을 이자벨르가 맡습니다. 필립 자신도 역할이 바뀌었음을, 자신이 사랑받는 쪽이 되었음을 압니다.

하지만 자신이 예전에 했던 역할을 그대로 재현하는 이자벨르를 그는 보듬어주지 못합니다. 그녀가 느낄 슬픔과 참담함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는 그녀를 위로하지도, 안심시키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예전 오딜르가 했던 대사를 되풀이할 뿐이지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라고.

언뜻 똑같아 보이는 사랑을 변주해서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것은 이자벨르입니다. 남편의 다른 사랑을 인정할 만큼 남편을 사랑하는 이자벨르는, 그를 향한 사랑이 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의 지난 사랑에서 위로를 얻습니다. 자신과 똑같이 절망적인 사랑에 괴로워했던 남편을 떠올리며 그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이, 이자벨르는 자기만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합니다.

“제 자신을 이겨냈다는 크나큰 승리란 제가 (당신의) 다른 여자를 받아들였다는 거예요. 체념과 즐거움마저 지니고서 받아들였다는 거지요. 만일 정말로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에 지나친 중요성을 줘서는 안 돼요.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고 있어요.… 그 사람을 지키고 내 것으로 간직할 수 있다면 그 외의 일은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이에요? 인생이란 너무나 짧고 너무나 고돼요.… 전 질투 같은 건 하지 않아요. 이젠 괴로워하지도 않아요.”

있는 그대로의 필립을 인정한다는 이자벨르의 사랑이 참사랑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사랑을 두고 참이니 거짓이니 하는 게 소용없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불같은 열정이 사랑인가 싶을 때가 있는가 하면, 그이를 위해 모든 걸 감수하는 게 사랑이다 싶을 때도 있고, 오직 참고 견디는 게 사랑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전부일 때도 있는 것이지요. 어쩌면 사랑이란 그 모든 걸 따지고 가리는 대신 덮어주고 보듬어주는 마음, 그뿐인지도 모릅니다.

더 많이 사랑해서 애달팠던 후배의 사랑도 얼마 뒤에는 가슴 뜨거운 추억이 될 겁니다. 그러기까지 또 오랜 시간 그 사랑을 돌아보며 복기(復棋)하고 원망하고 탄식도 하겠지요. 그러면서 그 사랑이 아니었으면 몰랐을 스스로를 만나겠지요. 아, 그러고 보면 사랑이란 나를 만나는 것인가 봅니다. 모두가 떠난 뒤에도 남는 한 사람, 죽는 날까지 사랑해야 할 사람, 바로 나 자신을 만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라면 너무 쓸쓸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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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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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로 (90.XXX.XXX.138)
얼마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남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건 내가 내 스스로를 참되게 대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요. 내가 나를 정직한 방식으로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을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 '바로 나 자신을 만나는 것' 이란 데 퍽 공감갑니다. 제대로 된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다면 남과 공유할 수 있는 내 부분의 영역도 커질 거 같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그 자기 사랑은 아마 '너무 쓸쓸'한 사랑은 아닐 거 같습니다.
아흐... 싸랑하고 싶은 날입니당. 좋을 글 감사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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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6 20:5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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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익 (98.XXX.XXX.34)
...사랑의 풍토 역시 기가막힌 글입니다.
철학보다 더 감칠맛 나는 철학입니다. 생각의 정연한 전개와 문장의 완전한 짜임새가 흠이라면 흠이라고 억지를 부려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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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6 03:4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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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석 (218.XXX.XXX.152)
글이 잔잔하고 아름답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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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4 21:5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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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opco (123.XXX.XXX.244)
5월 어느날 바람 피우고 싶은 날, 결국 나 입니다.
나를 찾기위한 긴 심연의 여행......
돌아와 보지만 또 다시 찾아 나서게 됩니다.
나이와 상관없는 여행의 횟수로 승화되어가는 아름다운 것.....
5월의 글과 오늘의글,
심리의 황무지에 꽃이 핍니다.
밤하늘에 별이 떠 오르 듯.
너무 아름다운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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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3 19:18:34
2 2
임영철 (218.XXX.XXX.152)
너무 멋진 글이네요.
답변달기
2009-12-03 11:3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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