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가던 날_(신아연)

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홈 > 연재칼럼 | 신아연 공감

16강 가던 날

신아연

2010년 06월 25일 (금) 00:14:10

밤새 내린 서설을 맞이한 경이로운 아침의 탄성처럼, 머리맡에 놓인 산타클로스의 선물 꾸러미를 풀 때의 설렘처럼, 엊그제 아침, 잠 덜 깬 눈을 비비며 확인한 한국의 월드컵 16강 진출 소식은 이와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쿨쿨 자고 있는 동안 우리 선수들은 이렇게 환상적인 게임을 펼쳐 주었으니 마치 '우렁이 각시'의 밥상을 받은 떠꺼머리 총각같이 고맙고도 송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자들이 남자들한테서 제일 듣기 싫어한다는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까지 용서가 될 정도로 요즘은 어디가나 축구이야기입니다. 아니 축구 이야기일 것입니다. 호주는 전 세계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니 전 세계 언어를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릇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니까요.

지구상 온갖 인종이 섞여 살다보니 월드컵 기간 내내 승자의 환호가 터지고 패자의 곡소리도 동일하게 들립니다. 어느 나라, 어느 경기든 간에 다수와 소수의 차이만 있을 뿐 희비가 엇갈리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골이 터질 때마다 일제히 환성을 내지르며 온 나라가 들썩이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이민자 나라의 월드컵 정경입니다.

나이지리아와의 경기 결과는 이미 아는 것, 일과가 끝난 느긋한 시간에 이르러서야 아껴 먹을 양으로 감춰뒀던 과자를 꺼내듯 녹화해 둔 경기를 틀었습니다.

'오늘 다음에 어제가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나온 시절이 좋았던 건 결코 아니지만, 내가 이미 다 아는 일들이 닥쳐 올 테니 적어도 두렵지는 않을 거 아냐.'

막 TV 앞에 앉았는데 오래 전 썼던 칼럼의 어느 소설 속 인용 구절이 느닷없이 떠오릅니다. 그 때 저는 '어제의 시점에서 오늘의 예측불허를, 오늘 지금 이 순간에서 내일의 불확실성을 얼마나 힘들어 했으면 그 무력감을 차라리 무슨 일이 벌어질지 벌써 다 알고 있는 어제가 오늘 다음으로 왔으면 좋겠다고까지 표현했을까.' 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오늘 다음에 온 어제'는 화자의 근심처럼 두렵기는커녕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두고두고 곱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화려하고 근사하게 찾아왔으니 오늘 다음에 온 어제가 마냥 좋기만 합니다. 물론 엄격히는 어제 일이 아니지만 닥친 일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뜻입니다.

눈 앞에는 '어제의 경기'가 기기묘묘하게 펼쳐집니다. '곧 반전될 상황이 올 텐데 그걸 모르고 지금 이 순간 모두들 저렇게 낙담하고 실망하는구나, 햐, 동점골을 뽑아 낸 지금은 모두들 서광이 비치고 희망적이라고 믿을 테니 결국 패배하게 된다는 걸 예상 못할 테지, 주장 박지성 선수는 동점골 이후 경기가 끝날 때까지 피를 말리는 것 같았다니 비길 줄 미리 알았더라면 룰루랄라하며 시간을 끌었을 텐데...'

남들 다 본 게임을 뒤늦게 보며 혼자 북도 치고 장구도 치면서 제 자신이 마치 전지한 신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듭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기대와 달리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도무지 매가리가 없고 신명이 나지 않았습니다. 경기 결과를 알기 때문에 시시하고 재미없다는 차원과는 좀 다른, 권태와 무료함이 정신을 꼼짝 못하게 동여매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기껏 축구도 이러한데 만약 삶의 결과를 미리 안다면, 무료와 권태의 스트레스에 매몰될 게 분명합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가까스로 터진 한 골에 거침없이 환호하고 아낌없는 열광의 박수를 보낼 수 있어야 하거늘, 순간순간 아깝게 놓친 기회에 장탄식과 애통함으로 반응하고 또 다른 찬스를 가슴 졸이며 기다려야 하건만, 역전과 반전의 엎치락 뒤치락을 넘나들고, 승리와 분패의 격정적 파노라마와 감동의 물결을 함께 타야 제 맛인데, 언감생심 역사적 순간이 와도 도무지 맨송맨송, 무감각, 무덤덤하기가 당황스럽기조차 했습니다.
제가 글에 썼던 오늘의 예측불허, 내일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은 완전히 제거됐지만 동시에 미래에 대한 기대와 열정, 희망과 선택, 상상력마저도 몽땅 빼앗긴 탓입니다.

결론이 이미 난 삶을 되짚어 사는 것도 그러할 것입니다.

'지루하게' 시간이 흘러 16강이 확정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우리 선수들과 국민들이 함께 연출한 그 새벽의 함성과 환희 속에 나는 빠져 있었다는 것이 한탄스럽다 못해, 실시간 경기를 놓치고 녹화된 화면을 보는 것은 마치 자기 삶을 남의 것인 양 관전하는 것과 같고, 순간순간 치열하게 살지 않으면 삶의 종착지에서 비슷한 회한이 들 것이라는 깨달음마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음에 어제가 오기를 바라서는 절대 안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marius (220.XXX.XXX.90)

이번 글은 여러 번 읽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승부의 결과는 이미 아는 것이었지만 어떻게 매듭들이 이어가고 풀려갔는지 하나하나 음미해보는 맛도 대단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생살이도 결과는 다 거쳐온 것이라 하더라도 건너온 고비마다 그 느낌이 다 다르지 않습니까. 지나온 시간들을 되새겨보는 그 맛은 보통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 지나갔으나 그때 고통과 슬픔은 실제로 느낄 수 없는 아름다운 자국이 되어있습니다. 어제의 경기를 오늘 다시 보신 신아연 부국장님의 여유로움이 정말 여유롭습니다.

답변달기 ▼

2010-06-28 17:54:37

0		0

신아연 (110.XXX.XXX.142)

그렇네요, 선생님. 지어진 매듭을 살펴보는 것, 음미해 보는 맛도 있겠네요. 다만 현재의 결과가 만족스러울 때라야, 옛말하고 살 때 있다는 말도 지금이 좋은 상태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니, 지나간 고통이 더이상 고통이 아니어야 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답변달기 ▼

2010-06-29 10:08:45

0		0

이 완식 (110.XXX.XXX.142)

오늘 16강에 대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모든 스포츠는 half time 이라는 것이 있고, 종목에 따라 작전타임이 있습니다.

똑 같은 휴식시간이지만 의미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half time은 쌍방 간에 rule에 의하여 주어지나, 작전타임은 경기 중 자기팀이 불리할 때 반전을 노리고 요청되는 점에서 다르다고 보아지는군요.

우리내 인생에서도 평탄하게 가는 사람도 있겠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복이 있기 마련이고, 이에 따라 어쩜 짧게 반전을 노리는 작전타임보다는 깊이 되돌아보는 half time이 필요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돌아온 인생을 되돌아 보며, 남은 여정을 계획하는 시간이 참으로 중요함은 우리내 삶이 주어진 가운데 작은 행복을 찾고, 만들어 가기보다는, 어쩌면 희망이 아닌 꿈인 행운을 찾아 열심히 살아온 것이 아닌지 생각하는 시간이 바로 half time이라고 보아지는군요.

지속적으로 운동을 하여 얻은 건강으로 힘을 내시고, 좋은 글을 많이 써 주세요

답변달기 ▼

2010-06-25 23:41:09

0		0

신아연 (110.XXX.XXX.142)

엊그제 어떤 분의 글에서 하프 타임의 기회를 얻는다해도 전반전에서 이미 지치고 기운 빠진 상태에서 하프타임의 성공을 기약하기가 어디 쉽냐는 탄식이 있었습니다.

하프 타임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람들을 볼 때 더 초조한 마음이 든다는 솔직한 고백도 있었습니다.

그 또한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처럼 지나 온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하프 타임과 후반의 인생은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격려의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변달기 ▼

2010-06-26 12:39:57

0		0

이무석 (110.XXX.XXX.142)

신아연 선생님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도 16강을 생각하며 기분 좋은 날들을 살고있습니다.

박주영 군의 자책골 보상도 기분 좋고

쓰레기 치우는 응원단들의 성숙함도 기분 좋습니다.

맛있고 공감이 가는 글 감사합니다.

광주에서 무석 배

답변달기 ▼

2010-06-25 18:20:34

0		0

신아연 (110.XXX.XXX.142)

답글을 드리는 지금, 월드컵은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맛있는 글 이라는 표현에 감사드립니다.

답변달기 ▼

2010-06-28 12:13:32

0		0

신아연 (110.XXX.XXX.142)

거리 응원 나가셨더랬나요? ^^ 그래도 우리 선수가 최선은 다했지요. 프로 세계에서는 실력차라는 것도 결국 2% 인데, 그 2%가 어마어마한 간극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답변달기 ▼

2010-06-28 12:15:06

0		0

인내천 (112.XXX.XXX.244)

그렇지요
아무리 이긴 경기라도 결과를 알고 보는 것은 조바심도 환호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불안하지만 예측불허의 내일이 있기에 오늘에 충실하고 치열하게 준비하는 삶이 가능한 것 아닐까요?
그러니 오늘 다음에 어제가 와선 절대로 안되죠~~^^

답변달기 ▼

2010-06-25 10:36:07

0		0

신아연 (110.XXX.XXX.142)

하지만 때로 생이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까...ㅜㅜ 아무리 준비해도 한순간 배신하는 삶... 그것이 곧 삶이라면 할 말 없지만요.^^ 어차피 오늘 다음에 어제는 오지 않으니까요...

답변달기 ▼

2010-06-28 12:16:11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