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잔(老殘)의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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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잔(老殘)의 몸’

황경춘

2010년 08월 31일 (화) 01:38:15

노(老) 자가 들어가는 한문 낱말에는 노련(老鍊) 등 한두 개를 빼고는 좋은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적다는 이야기를 금년 초에 쓴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일본인이 자기 수필의 제목을 ‘노잔(老殘)의 몸’이라 붙인 것을 보고 그이보다 서너 살 아래인 저이지만 너무나 솔직한 그 제목에 좀 섬뜩했습니다.

한자문화를 공유하는 나라에서 쓴 말이니 뜻은 대충 짐작할 수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는 낱말이라 생각되어 제가 가진 국어사전을 들춰봤으나 역시 그런 용법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평소에는 잘 들여다보지도 않는 한문대자전(漢文大字典)에는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귀찮아 찾아보지는 않고 그의 글을 읽어나갔습니다.

동경대학을 나온 후 대동아전쟁 때 일본 해군 정보장교로 근무한 경력을 가진 아가와 히로유키(阿川弘之) 작가는 주로 일본 근대 역사물과 인물평전(人物評傳)으로 많은 문학상을 받았고 그의 구수한 필치의 수필도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1986년의 일본 철자법 개정을 반대한 몇 안 되는 보수적 문필가 중의 한 사람으로 옛 철자법으로 작성하는 그의 원고는 잡지 편집자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遼太郞) 씨가 작고한 뒤를 이어 일본의 이름 있는 종합잡지 '분게이슌쥬'(文藝春秋)의 권두 수필을 10년 이상 맡아온 아가와 씨가 지난 달 이 잡지에 쓴 이 수필에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비참한 심정과 쇠잔(衰殘)한 자신의 건강상태를 처음으로 독자에게 공개하였습니다.

그는 젊을 때 당대의 대문호(大文豪)라 불린 시가 나오야(志賀直哉）씨에 개인적으로 사사(師事)했는데 그의 스승은 80대 중반까지 부부동반으로 지하철을 타고 번화가를 찾는 등 여생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런 분이 88세에 돌아가기 얼마 전부터 “더 이상 사는 게 싫어졌다”고 하며 가끔 거실의 커튼 끈으로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해버리면 간단한데 말이야”라고 농담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40대 후반이던 아가와 씨는 믿기 어려운 마음으로 스승의 표정을 살피곤 했는데, “좌우간, 노년이란 참으로 비참한 거야. 자네도 곧 알게 될 거야”라고 푸념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42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에 와서 노잔(老殘)의 몸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실감하고 있다”고 그는 썼습니다.

그의 스승 시가 씨는 “불로장생(不老長生)이라고 다들 말한다. 늙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다면야 이야기는 다르지만, 늙은 몸만 남고 오래 산다는 것은 질색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 스승은 만 88년 8개월로 세상을 떠났으니 나는 지금 스승보다 10개월을 더 살고 있는 셈이다. 그분의 입버릇을 빌려 ‘살고 있는 자체가 이젠 지겹다’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 자주 난다”고 아가와 씨는 덧붙였습니다.

그는 그의 근황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침대에 누워 독서만을 하는 나날이니 다리 ㆍ허리 근육이 쇠퇴하여 발로 바닥을 쓸며 불안하게 더듬더듬 걸어야 한다. 지팡이에 의지하면서도 노상에서 한 번, 집안에서 세 번 넘어져 골절까지는 안 갔지만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다. 외출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이것이며 운동부족으로 변비까지 왔다. 한 번은 심한 변비에 고생하다가 약을 정량 이상으로 먹고 누워 있다가 갑자기 변의가 생겨 일어섰지만 화장실까지 가는 도중에 실수를 해버렸다. 82세의 늙은 아내 도움으로 몸을 씻으며 다시는 이런 실수는 안 해야지 하고 다짐을 했지만 실토를 하자면 그 뒤에도 그런 사례가 몇 번 더 있었다.”

“이런 추잡한 노인의 볼멘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은 독자는 없겠지” 하며, 아가와 노인은 “이 권두 수필 란 따위에 세상과 거의 담을 쌓은 이 노인이 더 이상 얼굴을 내밀 처지는 아니지 않으냐. 편집 스태프들과 잘 상의해 볼 문제”라고 글을 맺었습니다.

원칙을 고집하고 시세에 영합하지 않는 이 아가와 씨를 저는 퍽 좋아합니다. 자기 나라의 아름다운 말을 젊은 사람들이 잘못 쓰고 있다고 날카롭게 비판하며, 그런 연유로 텔레비전은 하루에 몇 분 정도만 본다는 이 늙은 작가를 저는 2~3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피천득 선생과 비교해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두 분 다 글을 통해서만 알게 된 처지이지만, 옆집 사람에게 폐가 될까 봐 자신의 아파트 방 벽에 못 하나 박지 못하셨다는 피 선생은 어쩐지 이 아가와 씨와 상통하는 곧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장수가 오복의 하나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수(壽)도 건강이 따라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수를 다하기까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관리하고 있다가 큰 고통 없이 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많은 사람의 소원일 것입니다.

노년기(老年期)를 인생의 노을이라 부르고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에 비하여 미화(美化)하는 이도 있지만, 노잔(老殘)이란 말은 아무래도 비에 젖어 짓밟히는 꽃잎이나 낙엽을 연상케 하는 어감으로 어쩐지 씁쓸하게만 느껴집니다.

좋은 문학 작품으로 여러 사람의 칭송을 받고 지금껏 행복한 여생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된 아가와 씨가 스스로를 ‘노잔의 몸’이라고 부르고 몸이 불편한 자신의 안쓰럽고 삭막한 근황을 소개한 글을 읽으며 생각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이달 수필에는 무슨 소식이 있을까 하고 기다렸더니 예상한 대로 아가와 씨는 ‘각필의 기’(擱筆의記)라는 제목으로 이달을 마지막으로 수필 연재를 끝마친다고 발표했습니다. 각필이란 붓을 놓는다는 뜻으로 옛사람들이 편지의 끝에 잘 썼습니다.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우리 시야에서 아쉽게 사라지는 분들이 나라 안팎에서 많이 보도됩니다. 아가와 씨도 그중의 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만 스스로를 ‘노잔의 몸’이라 부르고 활동의 무대에서 물러서는 그의 용단에는 배울 바가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차덕희 (121.XXX.XXX.64)

5일전 어머니께서 세상을뜨셨습니다
85세로 새우잠을 주무시면서요.
어찌나 몸이 마르셨는지...만지면 부서질듯...
낙이라곤 손주들 얼굴을 보느것이 였지요.
자식들은 웬수처럼 어머니 속을 썩였지요.황선생님글을 펴보니 몸이 세월을 거스리지 못함이 만고의 진리임을 새삼 느낌니다.
황선생님의 즐거움은 무엇인지 궁금 함니다.
부디 건강유지 하시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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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1 21:4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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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자 (210.XXX.XXX.196)

늘 함께해주셔 감사합니다. 어머님을 잃은 슬픔 잘 압니다. 생전의
효성 아무 소용 없었던 것같은 허무감. 뭣에도 비교할 수 없지요.
전 그런대로 건강하고 큰 병을 앓고난 아내가 건강을 회복하고 아이들은
그런대로 큰 걱정을 끼치지 않으니 매일을 새롭게 즐깁니다. 그저
건강하다가 많은 고생 없이 갈 수 있으면 하는 생각뿐입니다.
건강하세요. 아이들을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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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1 11: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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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승 (121.XXX.XXX.2)

이제는 노년(老年)라는 단어도 싫은데 노잔(老殘)은 의미가 더 심각하게 다가옵니다. 노년기는 길어도 노잔기(老殘期)는 짧아야 좋을 것같은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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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1 15:2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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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210.XXX.XXX.196)

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합시다. 노잔의 소리 듣지 않도록
아름답게 건강하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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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1 20: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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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174.XXX.XXX.104)

선생님
글을 읽으니 마음이 그냥 쏴아~합니다.
노잔의 몸이 되지 않는 사람이 지구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 젊어서는 자신도 그러리라고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 젊음이 갖는 어리석음이지요.
노잔의 몸이 있기에 또 하나의 생성이 있지 않을까요?

꼭 건강하셔서 저희에게 좋은 말씀 계속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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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1 15: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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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210.XXX.XXX.196)

늘 관심 갖고 읽어주셔 고맙습니다. 그럼요. 늙은 몸이 새로운 싹을
키우는 거름이 되어야지요.좋은 거름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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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1 20: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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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웅 (210.XXX.XXX.196)

황 선생님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사셔서 좋은 말씀 않이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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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1 10:2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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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210.XXX.XXX.196)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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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1 20:3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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