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와 미네르바의 부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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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와 미네르바의 부엉이

김창식

2010년 10월 27일 (수) 08:11:19

대표적인 한국형 블록버스터 감독 강우석이 두 마리 토끼(작품성과 흥행)를 잡으려 작심하고 만든 영화 '이끼'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감독의 변신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었지요. 원작 만화(윤태영)의 스토리텔링 힘을 전달하려 한 노력이 보이고 고립된 마을의 세팅 재현 같은 미장센, 주‧조연 연기자의 실감나는 연기는 영화의 덕목이지만 상대적으로 감독의 역할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한 발 물러선 조정자의 역할이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영화가 기대와 달리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유야무야 묻힌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영화의 내러티브 구조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원작만화와 달리 변화를 주느라 각색했는지 모르지만 영화는 '선결후론법(先結後論法)'을 취했습니다. 도입부에 19년 전 핵심적 사건의 자초지종을 보여줍니다. 즉 기도원에서 구도자로 자처하는 유목형(허준호)과 천용덕 이장(정재영)간의 재산을 둘러싼 갈등과 공생, 야합을 먼저 보여주고,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접한 유해국(유목형의 아들‧박해일)이 마을로 찾아오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영화는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초입에 배치하여 관객은 주인공보다 많은 정보와 사전 지식을 갖고 드라마를 감상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주인공이 에두르고 헤매는 것이 답답할 수밖에요.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흐름이 처져 관객의 시선은 산만해집니다. '형사 콜롬보'처럼 범인과 두뇌싸움을 벌이며 정교한 추리로 트릭이나 범죄 방법을 밝혀내는 추리물이 아닌데도 패를 먼저 내 보인 '패착'을 범함으로써 박진감이 떨어지고 흥미가 반감된 것이지요. 모든 의혹이 '악의 표상'인 천 이장을 겨냥하고 있는데도 애써 주인공처럼 모른 체 하려니 답답하고 몰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게다가 상영시간은 어찌나 긴지. 무려 3시간 여 입니다.

영화는 초반에 선전하는가 싶더니 337만 명 관람이라는 실망스런 성적을 거두고 막을 내렸습니다. 아바타(1,327만 명)에야 비할 수 없겠지만 최근의 의형제(541만 명), 아저씨(650만 명‧상영 중)에 못 미칩니다. 탄탄한 원작스토리(칸 영화제에서 상 받고 흥행에 성공한 '올드 보이' 역시 유명한 일본 만화가 원작임.)를 공들여 만들고 광고로 띄우면 대박을 기대할 수 있을 법한데 흥행 메커니즘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합니다.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내로라 하는 흥행사들도 영화의 성공 여부를 장담 못합니다. 뚜껑을 열고 한참 기다려보아야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결과를 알 수없는 것이 어찌 영화뿐이겠습니까. 스포츠가 대표적입니다. 야구(9회 말부터 시작임), 축구(연장전과 승부차기 결과를 봐야 함), 골프(장갑 벗고 목욕탕에서 복기 필요) 등. 날씨도 마찬가지입니다(추석 연휴의 물난리 기억하시죠? 기상청에 슈퍼컴 한 대 더 들여놔야 함). 선거는 또 어떻습니까(투표 종료 후 개표 예측 방송을 봐야 하잖아요. 예측이 빗나가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주식 시세도 과연 그렇군요(가슴 아프지만 쪽박 차봐야 깨달음).

세상일은 모호함으로 가득 차 섣불리 진단하거나 예측하기 힘듭니다. 일찍이 독일의 관념 철학자 헤겔은 '법철학 강요' 서문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Minerva)는 황혼녘에 날아오른다.'라고 일갈했습니다. 미네르바는 아테나 여신이고 부엉이는 지혜를 상징합니다. 헤겔의 표현을 두고 해석이 분분하지만 지혜를 구하는 학문인 철학이 진행 중인 시대현상에 개입하지 못하고 상황이 종료된 후에나 간여한다는 의미로 자주 인용됩니다. 철학의 미흡한 역할과 위상에 대한 은유지만 일상의 삶에 대입하여 '뒤늦은 깨달음'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여겨지는군요. 우리네 삶은 지나고 난 뒤 허방다리를 짚는 뒤늦은 깨달음의 점철이 아닐는지? 헤겔의 멋들어진 레토릭을 우리 말 네 글자로 풀이하면 '뒷북치기' 정도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