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8일. 이날 새벽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군사기지를 기습 공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일생에서 6ㆍ25와 더불어 가장 큰 충격을 주고 향후 인생행로에 심각한 영향을 준 날입니다. 중국대륙에서의 오랜 소모적 침략전에 지친 일본제국주의는 막다른 골목에서 미국과의 화전(和戰)을 건 협상 도중 돌연 선전포고 없이 싸움을 걸어, 허를 찔린 미국에게 치욕적인 첫 패전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날 하와이에서는 12월 7일 일요일로 대부분의 군인이 모처럼의 주말 휴가를 즐길 준비를 하던 아침시간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이 평화로운 시간에 호놀룰루 교외 진주만 미 해군기지는 일본 전폭기와 소형 잠수함의 공격으로 문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이 공격으로 미 해군 태평양함대는 주력 전함 4척을 잃고 나머지 4척도 대파되는 치명적 손실을 받았습니다. 그 밖에 순양함과 구축함 각 3척이 침몰되거나 대파되고 188기의 항공기도 잃었습니다. 인명피해는 사망 2,402명에 부상 1,282명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두 차례의 공격에 참가한 353대의 비행기 중 29기만을 잃고 5척의 소형 특수 잠수함이 침몰되는 등 비교적 손실이 가벼웠습니다. 인명피해는 6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하고 한 명만이 포로로 붙잡히는 경미한 것이었습니다.

이 진주만 공격이 있은 후에 일본은 미국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뒤이어 미국을 비롯한 영국 네덜란드 등 연합국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정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서전(緖戰)의 승리에 취한 일본군은 미국의 식민지 필리핀, 영국의 식민지 싱가포르, 네덜란드의 식민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각처에 거의 동시에 공격을 시작하여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듯이 보였으나, 개전 후 반년도 못 가 필리핀 근해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패하여 제공권과 제해권을 다 잃어 결국은 1945년 8월 15일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습니다.

일본의 모험적인 도전 전략이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광복을 가져왔지만, 1930년대에 시작한 일본의 중국대륙 공작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한 당시의 일본 식민지 조선의 일반 시민 생활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 시작한 연합군과의 전쟁으로 식민지에 대한 착취와 통제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현대 같이 공개된 사회가 아니니, 극히 제한된 일부 특수층과 지하 항일운동에 종사하는 사람을 빼고는 국외 전황에 관한 소식이 차단되어 그저 맹목적으로 나날의 생존경쟁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잠시 동안 일부 국민이 공산치하에서 겪은 고통도 대단했지만, 거의 완전히 외부와 단절되어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 당시 식민지 생활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이 기울어져가는 전세(戰勢)를 만회하려고 징용이나 징병, 여자정신대로 끌려가는 참상은 나라 없는 민족만이 겪는 비극이었습니다. 해마다 12월 8일과 6월 25일 두 기념일을 맞이할 때의 감회는 눈을 감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의 한국전쟁에 대한 희미한 기억과는 다릅니다.

매년 8월 15일을 ‘종전(終戰)의 날’이라 칭하고 패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일본이, 이 1941년 12월 8일의 약간 야비한 방법으로 시작한 전쟁을 기념할 턱이 없습니다. 1980년 12월 8일 뉴욕에서 한 정신병자의 흉탄에 쓰러진 비틀즈 멤버 존 레논 추모행사는 열지언정 자존심 강한 일본인은 수치스러운 ‘진주만 기습’의 날을 공식적으로 기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워싱턴 주재 일본대사관의 사무착오로 개전 통고가 지연됐다느니 미국이 의도적으로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유혹하여 미국의 참전 구실로 삼으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등의 근거 없는 이야기들만을 여러 매체를 통해 흘렸습니다. 금년에도 신문 사설은 눈에 띄지 않고 오직 아사히(朝日)신문이 8일 조간 칼럼에서 무모했던 전쟁을 반성하고 반전(反戰)과 평화를 노래한 레논을 추모하는 글을 써 눈길을 끌었습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미국 참전의 직접 요인이 된 것은 물론입니다. ‘진주만을 기억하자’(Remember Pearl Harbor)가 대일 적개심을 자극하는 중요한 슬로건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당시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유럽에서의 전쟁을 태평양쪽으로 확대하는 데 반대하는 만만치 않은 국내 여론 때문에 별 성산(成算)이 없는 대일 교섭을 개전 직전까지 질질 계속했던 것입니다.

AP통신은 일본군 기습에서 살아남은 금년 92세의 한 노병이 120명의 다른 생존자와 함께 진주만 희생자 추모식에 참가한다고 전했습니다. 작년에 처음 참석한 이 옛 수병은 금년에는 거주지인 캘리포니아 주(州) 대표로 희생자에 헌화를 하기 때문에 처와 네 딸의 가족들을 동반한다고 했습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연간 약 160만의 관광객이 이 전적지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진실을 직시하지 않거나 역사를 왜곡하는 점에 있어 일본의 국제적 평판은 좋지 않은 편입니다. 그래서 일본 젊은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언행이 가끔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일본 수도 도쿄(東京)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지사가 최근에 그의 지인(知人)으로부터 들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교외(郊外) 대학으로 가는 전차 안에서 두 대학생이 나누는 대화 일부입니다.
“너 알아? 일본이 옛날 미국과 전쟁을 했대.”
“뭐? 그거 거짓말이지?”
“바보 진짜 이야기야.”
“정말? 그래 어느 쪽이 이겼대?”
이 사람은 여기까지 듣고 기가 차 다음 역에서 내렸답니다.

패전으로 얻은 민주주의와 이른바 ‘평화헌법’으로 생긴 이런 현상을 일본에서는 ‘헤이와 보케’(평화 치매)라 부르며, 그 반동으로 새로운 민족주의가 태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반미(反美)와 미일 안보조약 수정을 외치고, 전쟁을 반대하는 현 헌법 개정을 요구합니다. 그들의 핵 무장론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 이후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시하라는 그런 움직임의 주동인물입니다. 우리의 안보의식도 문제이지만 우리와 손잡고 나갈 이웃나라의 이런 국내 사정도 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