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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재경 2007년 04월 04일 (수) 11:06:59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아아 마이크를 시험 중입니다. 저기 운동장 뒤편에 계신 분, 이 소리가 잘 들리면 손을 들어 주세요.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아아 마이크를 시험 중입니다. 저기 운동장 뒤편에 계신 분, 소리가 잘 들립니까?” 어린 시절 학교운동장은 자주 이런 마이크 테스트로 소란스러웠습니다.

기계도 시원치 않고, 전기 사정도 좋지 않고, 손재주도 신통치 않던 시절, 그래서 모든 것이 불안하던 시절, 운동장에 행사용 마이크를 설치하는 사람들에게 마이크 테스트만큼 신경 쓰이는 작업도 없었습니다. 한없이 근엄하던 교장선생님이 단상에 올라 헛기침 몇 번 후에 ”에-. 학생 여러분!“ 하고 긴 훈화를 시작했는데 마이크가 따라오지 않는다면 방송 담당 선생님은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했겠지요. 만사불여튼튼이니까 마이크 테스트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반복할 수밖에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는 어쩌면 이렇게 해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저만 그럴까요? 요즈음도 50여 년 전의 아련한 운동장 추억을 자주 맛봅니다. 집에서 일을 하는 날이면 예외 없이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의 세례를 받게 되거든요.
“(딩동댕-) 생활지원센터에서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녀회 간부회의가 오늘 저녁 7시 생활지원센터 회의실에서 열립니다. 간부 여러분들의 전원 참석을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녀회 간부회의가 오늘 저녁 7시 생활지원센터 회의실에서 열립니다. 간부 여러분들의 전원 참석을 바랍니다. 이상은 생활지원센터에서 말씀 드렸습니다.(딩동댕-)”

요즈음은 아파트마다 관리사무소라는 낡고 칙칙한 이름 대신 생활지원센터라는 날씬한 이름을 쓰는 것이 유행입니다. 사무실도 지난날 지하실에 자리 잡고 있던 것과는 딴 판으로 독자 건물에 최신식 시설과 근무환경을 갖추었습니다. 음향설비는 일방형에서 쌍방형으로 진화했고 IT 기술과의 접목으로 홈오토메이션도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전자키가 없으면 자기 집도 드나들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방송은 아직도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입니다. 하드웨어는 초현대적이지만 소프트웨어는 아직도 반세기전의 수준입니다. 나이든 생활지원센터의 책임자는 안내방송이란 모름지기 두 번 반복해야 된다고 훈련받았을 수 있습니다. 만약 젊은 책임자라면 그가 다른 곳에서 일할 때 나이든 책임자로부터 방송은 두 번씩 해야 한다고 주의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원고를 읽는 젊은 여직원은 이런 상사들로부터 모든 멘트는 반드시 두 번씩 읽으라고 엄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파트 방송을 들으면 미국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계단지기 영감님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런던의 어느 건물 계단 옆에 영감님 한분이 종일 서 있는 걸 본 미국인이 묻습니다. 영감님 여기서 뭐하시느냐고-. 대답이 걸작입니다. 우리 아버지 대부터 쭉 이렇게 서있었다고. 호기심이 가득한 미국인이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영감님의 사연을 알아보았습니다. 수십년전 어느 날 건물 주인이 계단 손잡이에 페인트를 칠하면서 사람들의 옷에 칠이 묻을까봐 하인 하나를 손잡이 옆에 서있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인이 손잡이 옆에 있으면 그를 피해가느라 칠이 묻지 않게 되어있었거든요. 페인트는 한나절 만에 다 말랐으나 주인이 깜빡 잊어버리고 하인을 철수 시키지 않았습니다. 철수명령을 받지 못한 하인은 계속 그 자리를 지켰고 지금도 대를 이어 서있다는 것입니다. 변화가 느리고 보수적인 영국인을 비꼬는 조크입니다.

아파트방송을 들으면서 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간단한 안내방송 하나도 묵은 인습을 깨지 못해 오늘도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고 있는 판국이니 더 큰 사회적 관행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우리 주변에 계단지기 영감님이 어디 한 두 분입니까. 우리 사회에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는 이야기가 어디 한 두 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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