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에서_(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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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에서

방석순

2011년 01월 05일 (수) 00:43:39

연말연시, 술자리가 잦은 계절입니다. 곧 설이 닥칠 테니 사람들의 발길도 덩달아 분주해지고 그만큼 술잔이 오가는 기회도 많아지겠지요. 술자리에서 술을 사양하다 보면 ‘왕따’가 되기 쉽고, 오는 대로 마셨다가는 또 다른 낭패를 보기 쉽습니다.

요즘은 어떤 술자리에서건 건배사를 하는 게 큰 유행입니다. 그럴 듯한 건배사도 있지만 듣기에 민망한 말장난도 적지 않습니다. 저는 건배사로 그치지 말고 분위기에 걸맞은 시구(詩句)를 읊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별세 직전까지 치매 예방을 위해 산 이름을 외웠다던데 시를 암송하는 건 더 효과적인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술과 시(노래),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이태백(李太白)입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하고 우리네 민요에도 등장할 정도니까요. 술에 취한 이백이 채석강(采石江) 물결에 어린 달을 껴안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전설 때문일 겁니다. 평생 술에 취해 살던 이백을 두고 열한 살 아래의 문우(文友) 두보(杜甫)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李白一斗詩百篇(이백일두시백편) 이백은 술 한 말에 시 백편을 쏟아내는데
長安市上酒家眠(장안시상주가면) 장안 저자거리 주점에서 잠들었다가
天子呼來不上船(천자호래불상선)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自稱臣是酒中仙(자칭신시주중선) 스스로 이르기를 신이 곧 주선이요 하더라.

‘이두(李杜)’, 이백과 두보는 성당시대(盛唐時代)를 대표하는 대시인들입니다. 이백을 가리켜 시선(詩仙), 두보를 가리켜 시성(詩聖)이라고 부르지만, 이백 스스로는 주선(酒仙)으로 자처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술과 노래(시)는 아득한 옛적부터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셈입니다. 거기에 다정한 벗, 아름다운 자연풍광이 어우러지면 금상첨화겠지요. 이백의 ‘우인회숙(友人會宿)’이란 시가 딱 그런 분위기를 말해 줍니다.

滌蕩千古愁(척탕천고수) 겹겹이 쌓인 시름 털어버리고
留連百壺飮(유연백호음) 오래도록 머물며 싫도록 마시세.
良宵宜情談(양소의정담) 이렇게 좋은 밤 정담을 나눠야지
晧月未能寢(호월미능침) 새하얀 저 달 두고 잠잘 수야 있나.

성격이 담대하고 호방했던 이백은 세상에 나와 큰 꿈을 펼쳐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연 속에 파묻혀 시와 술로 살다 갔습니다. 세심하고 사색적인 두보는 미관말직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당시 사회상을 그림처럼 시로 펼쳐냈습니다. 그런 두보에게도 술은 시작(詩作)의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들에 못지않은 술과 시의 달인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의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입니다. 세종 임금 덕분에 한글이 만들어진 후로는 입으로만 전수되던 옛 사람들의 시와 노래가 한글로 정착되었고, 수많은 문인들이 한시 외에 우리말로 된 주옥 같은 시조와 가사들을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정철과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조선시대 시문학의 대표선수격입니다.

대쪽 같이 꼬장꼬장한 성품을 가진 정철은 선조(宣祖, 재위 1567∼1608) 대에 당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 술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급해지는 애주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정철의 성정을 가장 잘 나타낸 게 다음 시조일 것입니다.

“재 너머 성 권농(成勸農) 집의 술 닉닷 말 어제 듯고/ 누은 소 발로 박차 언치 노하 지즐타고/ 아해야 네 권농 겨시냐 정 좌수 왔다 하여라.”

이백은 ‘장진주(將進酒)’라는 시에서 “會須一飮三百杯(회수일음삼백배; 한 번 마시면 모름지기 삼백 잔은 마셔야지)”하고 호기를 부립니다.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리어 매어 가나 …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숲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 때 뉘 한 잔 먹자할꼬.…”

장진주사의 가사대로라면 누구라도 아니 마실 수 없겠지요. 이런 저런 구실을 대어 술을 피하는 벗에게 잔을 권하는 시조도 참 은근하고 집요합니다.

“일명(一命) 백년 산들 그 아니 초초(草草)한가./ 초초한 부생(浮生)에 무슨 일을 하려 하여/ 내 잡아 권하는 잔(盞)을 덜 먹으려 하는가.”

정철은 시름을 달래기 위해서, 남을 대접하기 위해서, 남들이 권하니까, 술이 주는 흥취 때문에 마신다고 합니다. 그의 술에 대한 집착은 57세로 수를 다할 때까지 이어져 수많은 걸작과 함께 구설도 빚어냈습니다.

한때 정철에게서 학문을 익힌 적이 있던 이발(李潑, 1544~1589)은 나중 동인을 이끄는 세력가가 되었습니다. 그와 서인의 우두머리격인 정철 간의 불화는 조정의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율곡(栗谷) 이이(李珥, 1536~1584)의 간곡한 권유로 간신히 둘 사이에 다시 교분이 움틀 즈음 그만 술이 사달을 내고 말았습니다. 화해하는 술자리에서 취기가 오른 이발이 몇 가닥 안 되는 정철의 턱수염을 잡아 뽑은 것입니다. 천하의 가객(歌客) 정철이 그때 자신의 심사를 나타낸 한시가 걸작입니다.

綠楊官北馬蹄驕(녹양관북마제교) 푸른 버들 북인 무리 말굽소리 요란한데
客枕無人伴寂寥(객침무인반적요) 객방엔 사람 없어 고요와 짝을 하네.
數個長髮君拉去(수개장발군납거) 두어 개 긴 수염을 그대가 뽑아가니
老夫風采便蕭條(노부풍채편소조) 노부의 풍채가 문뜩 쓸쓸하여라.

율곡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결국 둘 사이는 이렇게 어긋나고 맙니다. 다른 술자리에선 정철이 이발의 얼굴에 침을 뱉는 사고도 있었다 합니다. 동서 당쟁도 갈수록 심화되고 결국 이발은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목숨까지 잃습니다. 정철이 위관이 되어 동인을 몰아낸 기축옥사(己丑獄死) 와중에 장살(杖殺)된 것입니다.

‘화해 술’이라는 말은 아마도 허사인 듯합니다. 정철과 이발이 술자리를 빌려서라도 정말 화해했더라면 그 이후의 지독한 당쟁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언짢은 마음을 가지고 시작한 술자리니 가시 돋친 말이 오가기 십상이고 고비를 못 넘기면 더욱 원수지간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술은 즐거운 마음으로 마시면 약이 되고, 괴로운 마음으로 마시면 독이 된다고 합니다. 시름을 잊기 위해 마시는 술도 과하면 자신까지 잊어버리고 뜻하지 않은 사고를 부르게 됩니다. 다정한 이들과 즐거운 분위기 속에 예의를 갖추고 제 양에 맞추어 마시는 술이야말로 우애의 촉매가 되고 정신건강의 보약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다비 (174.XXX.XXX.138)

아~~ 그리운 한 잔.....
설송 아래 마시는 설송주는 어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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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9 08: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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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179)

열거하신 한시와 더불어 마시는 술이라면 그 누구의 술자리라도 한 층 격조를 더 할 것같습니다. 어디 그 흔한 "위하여!!" 류의 메마른 건배사에 비기겠습니까? 술자리에서 암송하긴 좀 분위기가 맞지않겠으나 평소 맘에 둔 한시 한편을 올립니다.

소낙비........ 노긍

바람이 쾅 사립문 닫자

새끼제비 놀라는데

소낙비 빗기더니

골 어귀로 몰려가네

푸른 연잎 삼만 자루에

흩어져 쏟아지니

떠들썩 온통 모두

갑옷 군대 소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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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5 23: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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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석순 (121.XXX.XXX.155)

좋은 시로군요.
한문으로도 올려 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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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7 13:2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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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210.XXX.XXX.172)

노긍의 소낙비 한문으로 올립니다.
風扉自閉燕雛驚急雨斜來谷口去
散入靑荷三萬柄盡作鐵軍聲
바람이 쾅 사립문 닫을 때 놀라는 제비 새끼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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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8 22: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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