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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창(梅窓)의 사랑노래
송광섭 2011년 01월 18일 (화) 04:49:22
曾聞南國癸娘名(증문남국계랑명) 일찍이 남국 계랑의 이름 들었고
詩韻歌詞動洛城(시운가사동락성) 시와 노래 솜씨 서울까지 떨쳤지
今日相看眞面目(금일상간진면목) 오늘 만나 진면목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각의신녀하삼청) 신녀가 삼청에 내려온 듯하여라.

「증계랑(贈癸娘)」이란 이 시는 부안(扶安) 명기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을 찾아온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이 첫 만남의 감회를 지어 바친 칠언절구(七言絶句)로서 이로부터 벌어지는 로맨틱 드라마의 서막을 여는 러브콜입니다.

매창은 열 살에 이미 시를 쓰기 시작하여 시, 가무, 가야금에 두루 능통한 예인(藝人)으로 주옥 같은 한시(漢詩) 수백 수를 남겼다고 하며, 그 중 시조 한 수와 『매창집(梅窓集)』에 수록된 한시 58수가 지금까지 전해와 황진이, 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으로 불립니다. 본명이 향금(香今)으로 매창(梅窓)은 그의 호이며 계유년(癸酉年)에 태어났다 하여 계생(癸生), 계랑(癸娘)으로도 불렸습니다.

촌은은 사대부 문인들과 교류하며『침류대시첩(枕流臺詩帖)』을 펴내는 등 걸출한 문인이었으나 중인 신분으로 국상이나 사대부집 상례(喪禮)나 집행하고 다니며 실의에 빠져 지내다 울분을 삭힐 겸 천리 길을 마다않고 소문난 기방(妓房)을 찾아온 것이었는데 매창을 만나는 순간 한 눈에 사랑에 빠집니다.

이때 촌은의 나이 마흔여덟, 꽃다운 갓 스물 매창과 28세의 나이 차이도 아랑곳없이 매료된 그는 그녀를 초회왕이 낮잠을 잘 때 꿈속에 나타나 교합했다는 신녀(神女), 시집도 못가보고 죽은 한을 풀기 위해 아침엔 구름이 되고 저녁엔 비가 되어 신선이 사는 삼청(三淸; 玉淸, 上淸, 太淸)에 운우(雲雨)로 내려온다는 전설 속 무산(巫山)의 신녀에 비유하며, 그해 봄 둘은 로맨스와 불륜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랑의 무아지경에 빠집니다.

桃花紅艶暫時春(도화홍염잠시춘) 복사꽃 붉고 고운 짧은 봄이라
撻髓難醫玉頰嚬(달수난의옥협빈) 고운 얼굴 주름지면 고치기 어렵네.
神女下堪孤枕冷(신여하감고침냉) 신녀라도 독수공방 견디기 어려우니
巫山雲雨下來頻(무산운우하래빈) 무산의 운우지정 자주 내리네.

꽃피는 봄을 만끽하며 무산 신녀가 내린 듯 둘이 나누는 잦은 운우의 정을 솔직 적나라(赤裸裸)하게 표출한 촌은의「희증계랑(戱贈癸娘)」으로 보건대 그들이 나눈 사랑의 열기를 가히 짐작할 만합니다.

그러나 달콤한 사랑도 잠시, 이 만남이 기나긴 비련의 시작일 줄을 어이 알았으리요. 유희경은 서울로 올라가고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던 터라 매창을 만날 겨를이 없고, 매창은 임 그린 정을 시조와 수십 편의 시를 통해 노래합니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라.

이화우(梨花雨)와 추풍낙엽의 시절의 흐름으로 미루어 긴 별리의 세월을 짐작할 수 있거니와 천리 길을 꿈속으로 오락가락하는 상사의 정이 여연(如然)합니다.

春冷補寒衣(춘냉보한의) 봄추위에 겨울옷 꿰매고자
紗窓日照時(사창일조시) 사창에 밝은 햇살 비칠 때
低頭信手處(저두신수처) 머리 숙여 놀리는 손길에
珠淚滴針絲(주루적침사) 눈물방울 바늘 실을 적시네.

봄은 왔건만 오스스 임 그린 가슴을 파고드는 한기와 진한 서러움을 노래한「자한(自恨)」이,

竹院春深鳥語多(죽원춘심조어다) 대밭에 봄은 깊어 새소리 요란해도
殘粧含淚倦窓紗(잔장함루권창사) 얼룩진 화장으로 주렴도 안 걷은 채
瑤琴彈罷相思曲(요금탄파상사곡) 거문고에 실어 상사곡 뜯고 나니
花落東風燕子斜(화락동풍연자사) 꽃 지는 봄바람에 제비들 비껴나네.

눈물에 얼룩진 화장 그대로 주렴도 걷지 않은 채 상사곡을 거문고로 뜯으며 시름에 겨워 가는 봄을 원망하는「춘원(春怨)」으로 이어지니, 한(恨)과 원(怨)이 겹치는 봄을 맞고 보내기 그 몇 해였던가!

한편, 촌은 역시 천리나 떨어져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을 여러 편의 시로 써서 뒤에『촌은집(村隱集)』에 남기고 있으며, 그 중 오동잎에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에 빗대어 읊은「회계랑(懷癸娘)」이 애를 끊습니다.

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계랑의 집은 낭주(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이 몸이 사는 집은 서울이라네.
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서로가 그리워도 만나지 못해
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나무 빗소리에 애를 끊누나.

그러나 아무리 매창의 사랑이 일편단심 촌은에게 향한다 한들 그녀는 뭇 사내들이 한 번은 꺾어보고 싶어 하는 노류장화(路柳墻花) 기녀의 몸입니다. 더구나 명기로 널리 알려진 그녀를 만나기 위해 부안으로 찾아드는 시문깨나 한가락 한다는 한량이나 사대부 풍류객들이 그 얼마이며 유혹인들 왜 없었겠습니까. 그녀의「증취객(贈醉客)」이란 시에 보면,

醉客執羅衫(취객집나삼) 취하신 손님 비단 적삼 당기시니
羅衫隨手裂(나삼수수렬) 잡혔던 비단 적삼 찢어졌다오.
不惜一羅衫(불석일나삼) 비단 적삼 찢겨짐은 아깝지 않지만
但恐恩情絶(단공은정절) 단지 맺은 정 끊어질까 두렵구나.

규방을 찾아와 술에 취한 손님이 그녀를 안고자 잡아끌다 비단 적삼이 찢기는 거친 희롱을 당하고도 임이 주신 은정이 끊어질까 두렵다는 여유를 부리며 양반 사대부를 어르는 고고의연(孤高毅然)한 기품이 엿보입니다.

기나긴 가혹한 별리의 세월을 사는 동안 매창은 김제 군수로 부임한 이귀와 잠시 시문으로 교유하며 정인으로 지낸 일과「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을 만나 문학적 교류를 통한 정신적인 우정을 나눈 플라토닉 러브의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오직 유희경을 향한 사랑만을 지키고 삽니다.

이렇게 지내기를 15년 만에야 두 연인은 재회를 하게 되는데, 강산도 두 번쯤 변했고 이미 나이 63세의 노인이 되어 나타난 촌은은 그 옛날 헤어지면서 열흘만이라도 시를 논하며 재회할 것을 약속하던 일을 상기하며「중봉계랑(重逢癸娘)」을 지어 읊습니다.

從古尋芳自有時(종고심방자유시) 예로부터 꽃향기 찾을 때 있다지만
樊川何事太遲遲(번천하사태지지) 번천*은 어인 일로 이리도 늦었던고.
吾行不爲尋芳意(오행불위심방의) 내가 꽃향기를 찾아감만 아니라
唯趂論詩十日期(유진논시십일기) 열흘만 시 읊자던 약속 좇을 뿐이오.

*樊川: 당 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2)의 호

그러나 이 재회가 옛날의 운우지정을 되살리려는 ‘심방(尋芳)’이 아니라 오직 ‘논시(論詩)’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딴전을 피우는 촌은의 속내를 어찌 보아야 할 것인지. 15년이란 세월의 무게에 눈에서 멀어져 마음도 멀어졌던 것일까? 아니면 이순(耳順)의 고개를 넘긴 유부남 유희경이 매창과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그의 안타까운 심정을 시에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한 연인은 이후 만나지 못한 채 3년 후 매창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뜹니다. 매창의 기녀수절(妓女守節)의 순애보는 이렇게 안타깝고 허탈하게 지고 매창의 부음을 들은 촌은은「도옥진(悼玉眞)」이란 애도시를 지어 읊습니다.

香魂忽駕白雲去(향혼홀가백운거) 향기로운 넋 홀연 흰 구름 타고 가니
碧落微茫歸路賖(벽락미망귀로사) 하늘나라 아득히 머나먼 길 떠났구나
只有梨園餘一曲(지유이원여일곡) 배나무 정원에 노래 한 곡 남아 있어
王孫爭說玉眞歌(왕손쟁설옥진가) 왕손들 옥진의 노래 다투어 말한다오.

당 현종과 양귀비(楊貴妃)의 불륜의 사랑을 아름답고 슬프게 묘사한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 빗대어 양귀비의 이름 옥진(玉眞)을 빌려 매창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그도 역시 자신의 사랑이 불륜이었음을 인정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로맨스의 결말은 언제나 이렇게 비극적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로 끝이 나야 하는 건지, 주고받은 사랑노래만 애틋한 사랑의 흔적으로 남아있어 마지막「도옥진(悼玉眞)」의 여운에 가슴이 아려옵니다.

1935년생. 인간의 편의를 추구해 건설기술 현장에서 평생을 보낸 토목공학도. 결과적으로는 지구를 흠집 낸 업보를 참회하는 마음으로 환경, 인류의 미래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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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121.XXX.XXX.168)
土木工學專門家로 平生을 지내시고 漢詩에도 造詣가 깊으십니다. 대단 하십니다. 眞心으로 敬賀 드립니다. 이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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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8 12:4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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