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임철순 담연칼럼
     
잊어 버립시다 꽃을 잊듯이
임철순 2011년 04월 25일 (월) 01:32:09
며칠 전 아침에 남산 순환도로를 1시간여 동안 걸었습니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남산에도 온갖 꽃들이 피어나 걷는 이들을 즐겁게 합니다. 벚꽃을 비롯한 연하고 엷은 색깔의 여러 꽃들은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미 꽃이 지고 그 자리에 연록의 잎이 난 나무들도 많았습니다. 새로 나온 연한 잎을 눈엽(嫩葉) 또는 눈록(嫩綠)이라고 하는데, 그것보다 더 여리고 연한 것을 가리키는 말은 없는지 궁금했습니다.

산에 자생하는 초목과 달리, 인공적으로 예쁘게 가꿔 놓은 화단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습니다. 아무데서나 보는 친숙한 꽃들은 아니지만 목마가렛 로즈제라늄 피나타…이런 이름표가 옆에 세워져 있어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예쁜 꽃의 모습을 다투어 촬영하는 사람들로 화단 주변이 붐비고 있었습니다.

화단의 꽃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물망초(勿忘草)였습니다. 예쁜 꽃들은 왜 다 보라색일까 하는 생각을 또 하면서 한동안 들여다 보았습니다. 도나우 강의 섬에 피어 있는 이 꽃을 사랑하는 여인에게 꺾어다 주던 청년은 급류에 휘말리자 꽃을 던져 주고 “나를 잊지 말라”는 말을 남긴 채 물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이 꽃 이름이 됐다는 게 독일의 전설입니다.

물망초란 영어의‘forget me not’을 번역한 말이며, 영어 이름은 독일어의 페어기스마인니히트(Vergissmeinnicht)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잊는다는 뜻인 영어 forget과 달리 독일어의 vergessen은 2격 지배 동사입니다.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잊는 행위에는 품사적으로 4격(목적격) 명사나 대명사가 연결돼야 할 텐데, 이 독일어는 특이하게도 2격(소유격)을 끌고 다닙니다. 영어로 그대로 옮기면 forget my not이 되니 참 이상합니다.

왜 그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지만, 사람의 경우를 생각하면 잊는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만을 잊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것 모두를 잊는다는 뜻이 담긴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의 이름은 물론 그의 기억ㆍ추억과 행위, 그의 말과 글과 표정, 그리고 그의 생명과 존재 자체를 완전히 기억 속에서 지우는 것이 망각의 참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런 철저한 망각을 미국 여성시인 새러 티스데일(1884~1933)의 시에서 나는 발견합니다.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난 그녀의 시 <잊어 버립시다>는 ‘잊어 버립시다/ 꽃을 잊듯이/ 한때 타오르던 불을 잊듯이’라고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시의 원문은 번역된 시와 많이 다릅니다. 제목 자체부터 <Let’s forget>이 아니라 <Let it be forgotten>, 잊혀지게 내버려 두자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한 우리 맞춤법대로 하면 ‘잊히게 내버려 두자’는 겁니다. Let it be forgotten, as a flower is forgotten,/Forgotten as a fire that once was singing gold,/Let it be forgotten for ever and ever,/Time is a kind friend, he will make us old.//If anyone asks, say it was forgotten/Long and long ago,/As a flower, as a fire, as a hushed footfall/In a long forgotten snow.//

잊어 버리자는 말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망각을 권하는 청유형 어법인 셈이지만, 잊히게 내버려 두자는 말은 그 망각의 정도가 훨씬 더 깊고 넓고 강렬합니다. 누군가 묻거든 아주 오래 오래 전에 꽃처럼 불처럼 눈 속에 묻혀 버린 발소리처럼 잊혔다고 말하라니 그 망각의 철저함이 놀랍습니다.

이 시를 생각하는 동안 대중가요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조영남의 <마지막 편지>. 그 어법과 발상이 빼다 박은 듯 새러 티스데일과 비슷해서입니다. ‘그날에 피던 꽃은 잊어 버려요. 한 조각 파편 같은 당신의 상처를. 그 누가 묻거들랑 세월이 가다 보면 사라져 희미해진 발자국처럼 그렇게 잊었다고 말해 주세요(1절). 그날에 타던 불은 잊어 버려요. 한 조각 구름 같은 당신의 추억을. 그 누가 묻거들랑 세월이 가다 보면 눈 속에 묻혀 버린 발자국처럼 그렇게 잊었다고 말해 주세요.’

꽃은 왜 불과 함께 다니는 걸까. 사람들은 왜 꽃을 좋아하는 걸까. 꽃은 하나의 역동적인 생명, 선연한 아름다움, 불은 가장 환하게 빛나는 현란한 생명…. 이런 뒤엉킨 생각을 조금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꽃과 불을 엮어 뭔가 그럴 듯한 사유를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새러 티스데일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잊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어떤 사람은 머리 속에 먹물을 부은 것처럼 어떤 시기의 기억을 철저히 상실했다고 하던데, 그것도 결국 마음 속에서 잊고 싶어했기 때문에 망각하게 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요즘 한창 유행하는 김범수의 <제발>이라는 노래가 한 행사장의 마이크에서 애절하게 흘러 나왔습니다. 1절만 옮기면 이렇습니다. ‘잊지 못해. 너를 잊잖아. 아직도 눈물 흘리며 널 생각해. 늘 참지 못하고 투정 부린 것 미안해. 나만 원한다고 했잖아. 그렇게 웃고 울었던 기억들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져 지워지는 게 난 싫어. 어떻게든 다시 돌아오길 부탁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길 바랄게. 기다릴게 너를. 하지만 너무 늦어지면 안돼. 멀어지지 마. 더 가까이. 제발.’

애절하긴 하지만, ‘너무 늦으면 나 딴 짓 할 테니 빨리 돌아와’하는 식의 공갈과 협박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우스웠습니다. 무엇인가를 잊는 것은 새로운 출발을 뜻합니다. 꽃을 잊는다는 것은 잎과 열매를 생각하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그날 함께 걸었던 사람에게 “이제는 어제 일도 잘 생각나지 않아. 갈수록 이런 현상이 심해지고 있어.”했더니 “자꾸 쌓기만 하지 말고 덜어낼 나이 아니냐?”고 말해 주더군요.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에 나오는 대로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떠나는 것일까.’삶은 그렇게 외롭지도 않고 슬픈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그 무엇인가를 그렇게 잊으려 하거나 또는 한사코 잊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 꽃들이 자꾸 바람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9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김윤옥 (210.XXX.XXX.215)
그대 잠든 뒤 ...김윤옥


그대 잠든 뒤에도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언젠가 하루 온종일 울어야지
다짐만 안타까울 뿐

싼 푸성귀
한 아름 사 안고
힘에 부쳐 종종 걸음 치면서

그대를 만나면 어쩌나
상념에 얼굴 붉히던 날들도 다 가고

골라, 골라
난장에서 발장단 외쳐대는
싸구려 옷가지 고르며

우연히 만나면 어쩌나
두려웠던 날들도 다 가고

하루 온종일 울어야지
내 다짐만 안타까울 뿐

그대가 잠든 뒤에도
세상은 아무 것도 변한 것 없어

천년이나 홀로 산 듯
정막 속에서
통곡이 목젖까지 차오르는데
정작 터지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늦은 봄 꽃잎처럼
내게 남은 마지막 몇 날들도
그렇게 다 흩어지고 말면

내 추억도 아득히 잊혀져서
이 세상에 아주 없었던 것처럼
바래고 말겠지요

그대가 잠든 뒤에도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 제게도 잊히지않는 추억이 있습니다........ '노래도 늙는구나' 사려고 서점에 가야하는데 가벼운 사고로 문밖출입이 다소 어렵습니다.
답변달기
2011-04-26 14:57:13
0 0
임철순 (211.XXX.XXX.129)
좋은 시를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회복하시기를 빕니다.
답변달기
2011-04-26 15:26:54
0 0
봄날 (115.XXX.XXX.23)
안녕하세요? 주필님..아드님을 통해 주필님의 글을 처음 읽게 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읽은 글은 봉필이이야기 였어요 ^^ 그후 이곳에 들어와서 열심히 글을 읽고 있습니다. 오늘 글은 정말 댓글을 달게 하네요..잊혀지게 내버려두자. 얼마나 잊기 힘들었으면 내버려두자고 했을까요? 추억이 나를 마구 헤집어도 잊을수 밖에없으니 내버려둬달란 거 그런걸까요? 잊는 다는 것은 그의 이름, 기억, 걸음걸이, 목소리, 말투, 웃음소리, 글씨, 눈길, 밥먹는 모습 이런 모든 거를 지우는 거겠죠? 좋은 글 너무나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답변달기
2011-04-26 14:33:35
0 0
임철순 (211.XXX.XXX.129)
고맙습니다. 저보다 더 많은 걸 말씀해 주시는군요. 그런데 어떤 아들인가요? 첫째? 아니면 둘째? 아들이 둘이다 보니...
답변달기
2011-04-26 15:26:12
0 0
봄날 (115.XXX.XXX.23)
주필님의 감수성을 그대로 이어받은
넘 이쁜 둘째 아드님요..^^ 정말 예쁜 아드님 두셔서 부러워요..
답변달기
2011-04-27 10:42:01
0 0
김휘동 (211.XXX.XXX.129)
잊는다는 것은 강하게 잊지 말라는 명령조도 있고 자연스럽게 망각한다는 내츄럴한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이 영어 단어를 자꾸 잊어바리니까 하시는 말씀이 잊어버려야 다시 채워질 공간이 생긴다면서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 나는군. 지금 우리 나이에는 더욱 절실하지 않을까. 과거의 기억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다가오는 젊은 세대와 함께 호흡하려면 자연스럽게 잊어야 하고 새로운 것들이 머리 속으로 들어오게끔 비워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건망증이나 치매로 가면 곤란하고.
답변달기
2011-04-25 11:21:07
0 0
신현덕 (211.XXX.XXX.129)
좋은 글 고맙습니다. 건강하십시요.신현덕 드림
답변달기
2011-04-25 11:20:37
0 0
이용백 (211.XXX.XXX.100)
글을 읽으면서, 문득 최영미시인의 '선운사에서'를 떠올렸습니다.<꽃이 피는건 힘들어도/지는건 잠깐 이더군/골고루 쳐다볼 틈없이/님한번 생각할 틈없이/아주 잠깐이더군/그대가 처음 내 속에서 피어난 것처럼/잊는것 또한 그렇게/순간이면 좋겠네/멀리서 웃는 그대여/산 넘어가는 그대여/꽃이 지는건 쉬워도/잊는건 영영 한참이더군/영영 한참이더군>...무엇을 기억하는 것보다, 잊는 게 훨씬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계절, 나중에 잊혀질 지라도, 좋은 기억 많이 담으시길...
답변달기
2011-04-25 09:03:52
0 0
임철순 (211.XXX.XXX.129)
고맙습니다. 이 시를 알고 있었더라면 베껴 먹었을 텐데. ㅎㅎㅎ
답변달기
2011-04-25 11:22:43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