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1일 저녁에 한 원로의 출판기념회가 열렸습니다. 막내딸은 사위와 함께 3년을 준비한 살사 춤으로 노부모님께 ‘효도의 재롱’을 부렸습니다. 원로 영문학자인 부인의 제자로 역시 은퇴한 두 명의 이대 영문과 후배 교수들은 무반주 듀엣으로 ‘유아마이션샤인’을 불렀고 그 중 한 분은 미진했던지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으로 시작하는 ‘동무생각’을 헌상했습니다. 축사와 화환이 홍수를 이루는 허장성세의 출판기념회가 따라오지 못할 향훈(香薰)이 가득했습니다.

	◇이당 전민제 박사의 자전적 회고록.

이날 구순을 맞은 출판기념회의 주인공 이당 전민제 박사의 생애는 우리 역사처럼 파란만장합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인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화학에 꿈을 두고17세 때 일본에 유학을 했으나 2년 뒤 어머니의 강청으로 귀국했습니다. 이후에 이당은 거의 독학으로 빙초산 공장, 황산 공장 건설 등 화학 공업을 일구었으며 6.25전쟁 때는 일본에서 소총제작 기술을 배워와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발사 실험을 하다가 굉음으로 오른쪽 귀 청력을 잃었습니다. 동경물리학교를 중퇴한 그는 대학을 건너뛰었지만 능력이 인정되어 1948년 서울대 공대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당은 이 무렵 해외 자료를 연구하여 부존자원이 없는 나라가 발전하려면 공업을 일으켜야하고 그러려면 에너지를 공급할 정유 산업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시절 일제가 운영했던 조선석유의 무보수 관리인이 되어 최초의 울산정유공장 설립계획을 본격적으로 입안했던 그의 꿈은 1961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앞에서의 브리핑으로 성사되었습니다. 10년간의 ‘기술 낭인’같았던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감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2,000만 달러의 정유공장 건설비가 없었습니다. 1962년 우리나라의 수출규모는 5,480만 달러에 불과했죠. 아예 100% 외자기업으로 하자는 일부 관리들의 의견도 있었지만 석유공사설립위원으로 기술이사가 된 이당은 미국에서 걸프오일과 교섭을 벌여 25%의 지분을 주는 대신 차관을 얻어내 국가기간산업을 지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대한석유공사 울산정유공장은 1964년 2월 일산 3만5,000 배럴 규모로 시운전을 개시했으며 잠깐 수요가 모자라 고전했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286만 배럴의 정유 강국이 되었습니다.

중동 사정에 누구보다 정통했던 이당은 1973년 오일쇼크가 터졌을 때 최규하 특사와 함께 파견되어 사우디 국왕을 알현했고 원유의 안정적인 공급을 확약 받아 에너지 위기를 푸는데 기여했습니다. 유공 사임 이후엔 전엔지니어링과 신한기공을 일궈 플랜트 설계와 시공 전문의 기업 활동을 펼쳤습니다.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에 플라스틱 원료가 되는 불포화폴리에스터 수지공장을 건설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턴키(Turn-key) 플랜트 수출로 그의 공이었지만 1980년 국보위의 강압적인 해외건설규제 조치로 결국 몇 년 뒤 꿈과 땀의 결정체인 기업체들을 남의 손에 넘겨야했습니다.

‘怡堂 全民濟- 화학, 석유, 그리고 엔지니어링 산업을 향한 꿈’(비매품)은 재단법인 한국화학회관이 올해 유엔이 정한 ‘세계화학의 해’를 맞아 첫 번째 자전적 회고록으로 낸 것입니다. 결혼 전부터 거의 60년간 전민제-나영균 선생을 지켜봤다는 김동길 박사는 축사에서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데는 오로지 외길을 걸어온 전민제 선생의 보이지 않는 공이 있을 것입니다. 이 분은 시대의 큰 인물”이라고 치하했습니다. 김 박사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Grow old along with me. the best is yet to be, the last of life, for which the first was made.(세월 따라 함께 늙어갑시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도 오지 않았으니, 인생의 마지막 그걸 위하여, 인생의 처음이 만들어 진 것.)"를 읊으면서 아직도 큰 어른의 할 일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인척인 이수성 전 국무총리는 논어를 인용하여 ”군자는 언제나 나라의 이익을 생각하고 소인은 자기의 이익을 생각합니다만 이 분은 군자중의 군자로서 정유가 아니라 제유를 하셨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이만큼 기반을 닦았으니 언제나 큰소리를 할 수 있는 어른“이라고 찬양했습니다. 김시중 전 과기처 장관은 ”기술보국의 정신으로 엔지니어링 산업을 육성하고 정유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이 분의 회고록은 화학도들에게 귀중한 삶의 지침서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전민제 선생은 답사에서 “책을 내게 된 동기는 개인의 과거를 돌아보려는 의도가 물론 있었습니다만 한 시대의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는 생각이었습니다.”라면서 “우리들은 농업중심의 경제를 현대화하고 산업화하려고 무진 노력을 했습니다. 세계의 주목을 받을 만큼 우리는 역사상 최초의 경제성장을 이룩했습니다.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는 후대를 위해 기록을 남겨야하지 않겠습니까? 후배들이 이 기록에서 조금이라도 얻는 바가 있다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저는 조그만 꿈을 실현하고 산업화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생각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저를 받쳐주시고 도와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손위 친구이자 쌍용양회 건설의 주역인 남기동 선생은 정정한 목소리로 이당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건배를 제의했습니다.

이당은 2006년 서울대 공대가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으로 선정할 만큼 나라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습니다. 이 뜻 깊은 출판기념회에 얼굴 내밀기 좋아하는 정치인들은 안 보였습니다. 음양으로 이당의 도움을 받았을 당시의 고위직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진심으로 축하하는 친지와 직장 동료, 후학들의 참석과 화환이 의연히 자리를 빛냈습니다. 행사에는 90분만 초청하고 널리 알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당의 삶이 각인된 회고록을 받아 들고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우리나라의 많은 저명한 분들은 세상과 담을 쌓듯 입을 꾹 다물고 교훈이 될 글을 남겨주지 않는가?”

2010년 세상을 떠난 법정 스님은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달라”고 유언했습니다. 그러나 팔순의 말년에 ‘죽창수필(竹窓隨筆)’을 낸 중국의 고승 운서주굉(雲捿袾宏,1535~1615)은 이렇게 썼습니다. “아! 나 이제 늙었으니 지는 해 또 얼마나 남았느뇨. 이렇게나마 말하지 않고 또 어느 때를 기다릴 것이며, 만약 중생을 이익 되게 하지 않으면 다른 날 언제 저들을 구휼할 수 있으랴. 그리하여 이 글을 쓰노라.”

난세일수록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활약하신 어르신들이 자신들의 농축된 삶을 글로 써서 후세를 가르쳐야 이 나라는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