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에 세상을 떠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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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에 세상을 떠난 친구

황경춘

2011년 07월 25일 (월) 00:51:21

35년의 치욕적인 일제강점 뒤에 맞이한 1945년의 광복은 이 땅에 민족적 환희와 함께 말할 수 없는 사회 혼란을 가져 왔습니다. 일본의 패전을 예측은 했지만 독립운동의 주체세력이 해외에 있었던 관계로 정권을 이양 받을 충분한 준비가 없었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패전국 일본의 점령 정책을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한 미국이 우리 정부 수립까지의 과도기 행정 담당 준비에 소홀했던 점도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사회 혼란의 중심에 좌우 사상투쟁이 있었습니다. 일제의 혹독한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으로 옥살이를 하다 석방된 독립 운동가를 포함한 많은 ‘사상범’(思想犯)들을 주축으로 한 이데올로기 투쟁은 곧 있을 새 정부 구성 주도권 싸움과 맞물려 좌우 파벌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암살, 폭행 등 테러 행위가 끊이지 않은 서울은 말할 것 없지만 시골에서의 좌우 항쟁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제 고향 경남 남해군은 당시 인구 약 10만의 섬으로 지금처럼 연육교가 생기기 전엔 제일 가까운 도시 삼천포에 가는 데도 하루 두 번밖에 없는 통통배로 두 시간쯤 걸리는, 교통이 불편한 곳이었습니다. 이런 시골에서도 광복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좌우 단체들이 난립하였습니다.

저는 일본군 징병으로 6개월 복무 후 1945년 9월 초순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얼마 후 저와 제일 가까웠던 초등학교 한 해 후배 친구가 좌익계 청년단체 회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곧 미 군정청 제견부대에 취직을 했기 때문에 그 친구와는 전화 연락만 몇 번 있었습니다. 한동안 소식이 없어 인편으로 알아보니 그 친구는 경찰의 지명수배를 피해 얼마 동안 도피생활을 하다가 건강을 해친 끝에 사망했다는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이 친구와는 고등학교는 달랐지만 방학만 되면 만나 공부나 짧은 여행 등을 같이 하며 매우 다정하게 지냈고 가족끼리도 친분이 있는 사이였습니다. 진주나 부산 등지 고등학교에 유학하는 학생이 몇 안 되는 시골이어서, 방학 때마다 어울려 다니는 우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가깝게 지냈습니다.

특히 의사를 꿈꾸고 도전한 입시에 실패하여 재수를 시작한 그와 일본군 징병검사를 마치고 당시 ‘저승사자’라고 불리던 소집장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던 저는 1944년 하반기에 일종의 허무감으로 방랑생활 비슷한 행동을 많이 하였습니다. 먼저 소집장을 받은 친구들의 ‘장행회’(壯行會)에서는 평소에 마시지 않는 술도 함께 마시고 시골 신작로를 고성방가(高聲放歌)하며 쏘다니기도 했습니다. 정작 제가 군대로 떠나는 날엔 대학입학시험 관계로 그 친구는 시골에 없었습니다.

제가 귀국한 직후 집으로 찾아온 그와 그 동안 밀렸던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좌익 청년단 단원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사회주의에 관한 소책자도 두세 권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소속된 청년단에 가입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취직하기 전까지의 약 한 달 동안 몇 번 더 만났습니다만 오랜 친구였던 그와 그런 식으로 영원히 이별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슬픔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15 년의 세월이 흘러간 뒤, 저는 서울에서 고향 사람들 모임에서 우연히 그의 노모를 만났습니다. 제가 언론관계 일을 시작한 얼마 후였습니다. 서울에 사는 딸네 집에 잠시 와계시다가 저를 본 그 노모의 슬퍼하시는 모습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은 했지만 도저히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만날 용기가 생기지 않는 속 좁은 자신을 원망만 하다가 끝내 찾아뵙지를 못 했습니다. 그 뒤 한두 번 연락이 있었던 그의 여동생과도 소식이 두절되었습니다. 만사에 소극적이고 마음이 약한 저의 인생에서 지금까지도 생각이 나는 그와 그의 어머님에 대한 빚 진 듯한 감정은 죽을 때까지 저를 괴롭힐 것 같습니다.

제 선친과도 알고 지내던 이 친구의 아버지는 면사무소 근처에 행정대서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서업은 상당한 사회적 대접을 받는 직업으로 수입도 괜찮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 집은 직접 농사를 짓지는 않지만 소작(小作)을 준 토지가 꽤 많았습니다.

이 친구 먼 친척 형에 일본 음악학교를 다니다가 시골 초등학교의 교원으로 있는 분이 있었습니다. 나이는 우리보다 훨씬 위였지만 방학 때엔 가끔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습니다. 우리 집에 유성기가 있어 아버지의 판소리 레코드 사이에 누가 샀는지 모르지만 ‘카르멘’과 ‘춘희’ 서곡 등이 끼어 있었습니다.

이 형이 가끔 우리 집에 들러 우리에게 오페라 음악의 설명도 들려주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이 형이 광복 후 우리 시골의 사회주의 청년동맹을 조직한 간부였다고 합니다. 제 친구가 경찰 수배로 숨어 다닐 때, 이 선배도 연루자로 몰려 야산에서 밤을 새우며 지하활동을 계속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이 선배도 멀지 않아 지병인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1946년 가을에 부산에 일자리를 구해 시골을 떠났습니다. 6ㆍ25가 터지자 얼마 안 가 이 고향 섬은 남하한 공산군에 두 달여 점령당하여 다시 혹독한 이데올로기 전쟁의 세례를 받고 많은 고향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정부 수립 후 한 때 좌익운동을 한 사람들이 ‘보도연맹’으로 묶여 온갖 고생을 하다, 이 사람들의 일부가 다시 득세하여 이번에는 많은 우익계 인사들이 희생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사회를 어지럽힌 사상 갈등의 축소판이 이 작은 섬 마을에서도 벌어진 것입니다. 6ㆍ25와 두세 번의 혁명을 거쳐 외형적으로 경제발전을 이루고 OECD의 선진국 대열에 끼기는 한 나라이지만, 보혁갈등으로 사회가 여전히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요즘, 광복 후 걸어 온 조국의 험난한 길을 되돌아 볼 때 곧 있을 광복절을 맞이하는 마음이 착잡합니다.

차덕희 (121.XXX.XXX.189)

글을 읽고 착잡한 심정이 됨니다.
직접 겪은 세대의 증언에도 무지에서 온 사상의 대립이 상당한 주검을 초래했다고 함니다.
지금은 계몽이 잘된시기 인데도 사회가 혼미한 이념론으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토론의 문제로는 해결이 않나는 주제이지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나라에 살고 있어서 신심으로 기도하는 방법도 이데올로기의 양극화를 좁히는 방법이 되지 않으까 기대를 가져봅니다만...
청춘시절 잠시거치는 열병으로 보기에는 좌우파의 대결이 매우 끊질긴 문제로 인식됨니다.
세계화로 부익부,빈익빈의 간격이 더 벌어진 상태에서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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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5 08: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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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110.XXX.XXX.186)

그때보다 몇배 더한 정치적 투쟁이나 혹독한 고문에도 살아 남은 친구가
많은데, 뜻을 이룰지 못하고 가버린 그가 지금도 가엾습니다.
언제나 글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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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6 23: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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