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임철순 담연칼럼
     
문자 속
임철순 2007년 05월 14일 (월) 10:06:15

 이 길은 정말 걷기가 싫습니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 역에서 올라와 한진해운 빌딩까지 가는 길은 들끓고 넘치고 소란스럽습니다. 퇴근 때는 그 반대로 걷지만 당연히 아침보다 더 붐빕니다. 雜沓(잡답) ,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많아서만이 문제가 아니라 길 자체가 아주 이상하게 생겼습니다. 다른 길들처럼 평평하지 않고 차도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청소하기 좋은 길, 무엇이든 쓸어 내리기 편한 길, 돈이 최고인 길, 도무지 돼먹지 못한 그런 길입니다. 이 길에서는 균형이 잡히지 않고 똑바로 서서 똑바로 걷기가 어렵다는 기분이 듭니다.

 일요일이나 공휴일 아침에는 사람들이 적어 좋지만, 장화까지 갖춰 신은 쇼핑센터의 남녀 직원들이 호스를 이리저리 길게 늘이고 세제를 풀어 대대적으로 박박 물청소를 합니다. 돈이 안 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쓸어내 버릴 기세입니다.

 이 쪽으로 이사 온 지 석 달이 넘었는데도 정이 가지 않는다, 마음 붙일 데가 없다, 맹자 엄마는 아들을 위해 묘지에서 시장으로, 이어 학교 주변으로 세 번 이사를 했는데 나는 오히려 학교 주변에서 장바닥으로 나온 셈이다…아는 사람에게 이렇게 이메일을 보냈더니 大隱於市 小隱於山(대은어시 소은어산)이라는 답장이 왔습니다. 크게 깨달은 은사는 오히려 저잣거리에 숨어서 살고, 좀 덜 깨달은 사람이 산에 숨어 산다는 뜻입니다. 원전은 정확히 모르지만 여러 한시에 나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네가 대은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말도 있으니 이제 대충 그만 투덜거리고 엄살 부려라, 그런 뜻입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아서 고마웠습니다. 문자 속이 기특한 것은 좋은 일입니다. 남을 고무ㆍ격려하는 말의 힘과, 정곡을 찌르는 문자 속의 고마움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그런 경험은 또 있습니다. 한 달쯤 전, <나이가 들수록>이라는 자유칼럼의 글에 강원대 철학과 남상호 교수의 말을 인용했더니 강의시간에 그 글을 학생들에게 읽어 주었다면서 화답하는 뜻으로 한시를 한 편 보내왔습니다. 그의 다른 한시를 서예가가 써 넣은 부채도 보냈습니다.

 그의 화답시는 和風一起萬生興 細雨微施大地蒸 五十修身無體得 從心順命充虛膺(화풍일기만생흥 세우미시대지증 오십수신무체득 종심순명충허응)이라고 돼 있습니다. 봄바람 살살 불면 만물이 깨어 나고 보슬비 조금 내려도 대지는 생기를 뿜네. 오십평생 수신에 얻은 게 없으니 마음을 좇고 명에 따라 빈 가슴 채워갈 뿐-이런 뜻이랍니다. 내가 “지천명의 나이에 천명을 알기 어렵다”고 했더니 그 말을 되돌려 준 셈입니다.


 나도 그처럼 문자 속이 깊으면 뭐라고 한 편 써 보내 갚아 주련만 아는 게 없으니 그저 받기만 할 뿐입니다. 한시 작법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도 남에게 좋은 말을 해 준 기억은 있습니다. 1969년 겨울, 대학입시에 떨어진 친구의 자취방에 찾아갔다가 그가 없기에 <명심보감>의 한 대목과 함께 긴 편지를 써서 문틈으로 밀어 넣고 왔는데, 나중에 읽은 그가 너무도 감격을 하는 바람에 내가 오히려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인용한 명심보감의 글은 難忍難忍 非人不忍 不忍非人(난인난인 비인불인 불인비인), 참는 것의 어렵고 어려움이여, 사람이 아니면 참지 못하고 참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떨어졌다고 좌절하지 말고 참고 이기라는 뜻이었지요. 그는 곱사등이였고, 사실은 그 때문에 떨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는 결국 여러 가지 사정으로 끝내 대학에 가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7년쯤 전에 부산에 갔을 때 좀 만나자고, 나오라고 전화했더니 당뇨가 심해 잘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얼마 후 그는 힘겨웠던 삶을 마감했습니다. 내 편지와 소주 한 병을 들고 찾아와 하숙집 앞의 돌계단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던 ‘조그만’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반드시 거창하고 유식한 말이나 문자 속이 아니더라도 남을 위해 적절하게 좋은 말을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삶의 어떤 고비에 어떤 말들은 가슴 속에 깊이 들어와 박히는 것 같습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0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