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대 황제 583명 중에서 가장 위대했던 황제가 누구냐고 하면 흔히 당태종 이세민을 꼽습니다. 唐(당)의 2대 황제였던 그의 치세기간 22년은 새로 일으킨 나라를 안정시켜 발전을 지향하는 태평성세, 국운 융성의 시기였습니다. 당태종 재위기간의 정치를 그의 연호 그대로 貞觀之治(정관지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이 말을 빌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통치하는 지금의 중국을 胡溫之治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말에서 잘 알 수 있는 것은 후진타오보다도 원자바오 총리에 대한 사랑과 존경입니다. 쓰촨(四川)성 대지진을 비롯한 국가적 큰 불행이나 경사가 있을 때, 원자바오 총리는 늘 국민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면서 겸손하고 검소한 삶과 언행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재상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왜 그런 사람이 없을까 하고 실망하다가 김황식(金滉植) 국무총리의 요즘 말과 활동을 보면서 적이 안심을 하게 됩니다. 정부 수립 이후 전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지난해 10월 취임한 김 총리는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별 색깔이 없는 사람입니다. “존재감이 없는 게 내가 목표하는 바”라는 말도 했습니다. 사실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총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돼 있고, 특출한 정치인이 아닌 바에야 존재감이 큰 것도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1년 남짓 총리로서 활동하는 동안 그는 대법관 감사원장을 역임한 분답게 매사를 사려와 분별로 처리하면서 ‘조용한 카리스마’를 쌓아왔습니다. 김 총리는 “우리 사회와 정부를 안정감 있게 끌어가는 것이 내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업무”라며 “이슬비처럼 조용히 내리지만 대지에 스며들어 새싹을 키우고 열매를 맺는 역할을 하는 총리로 일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은 나를 잘 모르지만 내가 일한 게 쌓여서 국민에게 돌아가면 그게 더 좋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를 인상 깊게 한 것은 연평도 포격 1주기 추모식에서 속옷까지 흠뻑 젖도록 40여분간 비를 맞으며 흐느끼던 모습입니다. 우산 받기를 거부한 채 희생된 해병 용사들을 추모하는 모습에서는 진심으로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는 국무총리의 진정성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마저도 쇼라고 폄하하거나 김 총리의 그런 모습을 보도한 언론을 미화ㆍ찬양한다고 비난했지만, 그렇게 볼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 총리는 최근에도 화재 현장에서 순직한 소방관의 빈소를 의전팀에 알리지 않고 찾아가 조용히 조문하고 왔습니다. 자신의 업적과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사람다운 행동입니다. 김 총리는 대학생들과의 대화에서 “요즘은 군림하거나 술수를 부리는 지도력은 통하지 않는다”, “상대방과 눈높이를 맞추고 낮은 자세로 일해야 리더십이 생긴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나는 두 번 그분의 초대를 받아 함께 점심 식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거지라 해도 집에 찾아오는 사람에게 늘 정성을 다했고, 남을 돕는 데 앞장섰다고 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 김 총리는 집에 거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엄마, 그지 와!”하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거지에게 밥을 주어 보낸 뒤 아들을 붙잡아 앉히고, 사람을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며 아무리 천하고 못난 사람이라도 정성을 다해 대해야 한다고 꾸중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어머니의 가르침이 지금의 김 총리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김 총리는 문학적 감수성도 뛰어나 보입니다. 젊은 시절의 신춘문예에 대한 열정도 이야기해 주었고, 글을 잘 쓰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도 숨김없이 털어놓았습니다. 암 투병을 하면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라는 신작을 낸 최인호 씨 이야기를 하다가 “한번 격려 좀 해 주시라”고 했더니 과연 김 총리는 그뒤 난과 함께 쾌유를 기원하는 카드를 최씨에게 보냈습니다. 최씨와는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닙니다.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는 “젊은 시절 좋아하던 김승옥 선생은 오랫동안 창작 활동을 하지 않고, 이청준 선생은 작고하고, 최인호 선생은 투병 중이어서 허전했던 참이었다. 훌륭한 작가, 좋은 작품을 가진 사회는 행복하고 여유 있고 품격 있다. 훌륭한 작가를 존경하고 아껴야 하고, 또한 작가가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은 독자들에 대한 책무다.”라고 썼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아마도 김 총리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명박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할 것입니다. 앞으로 14개월 정도 남은 셈인데, 이 기간에도 변함없이 보편타당한 상식과 분별을 갖춘 총리로서 든든하게 제 자리를 지켜 주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김 총리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요즘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이나 여론 주도층이 하도 이악스럽고 사납고 난폭하고 말을 함부로 하고, 품격도 없고 관용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늘 싸움질만 하는 게 보기 싫어서입니다. 사회적 신분이 높고 영향력이 클수록 오히려 사려와 분별이 모자라 보이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