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칼럼 | 게스트칼럼
     
초보 영업사원이 가르쳐 준 것
이승훈 2011년 12월 07일 (수) 03:04:06
정신없이 바빴던 오전 시간이 지나가고 커피라도 한 잔 하면서 잠시 쉬려는 마음에 환자 대기실을 향하던 중에 병원 입구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사람이 하나 눈에 들어왔습니다.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외모에 어딘지 모르게 주저하는 표정. 아마도 보험이나 카드 가입을 권유하기 위해 오신 분 같았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병원을 찾은 분들은 원장인 저의 얼굴도 못 보고 다른 직원들이 돌려보내는 것이 보통인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이번 영업 사원은 우연히 저랑 마주치게 되었으니 비교적 운이 좋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영업 사원이라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겠지만 어쩌면 진료를 겁내는 환자일지도 몰라 더욱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저…. 혹시 00카드 한 장 안 만드시겠습니까?”

처음의 어색한 태도에서 예상은 했지만 영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분 같더군요. 너무나 자신감 없는 태도와 아무 서두 없이 용건만 말하는 모습을 보면 필요한 물건이라도 구입하기 싫을 겁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카드를 만들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하나만 좀 부탁합니다. 제가 연회비도 면제시켜 드리고 이것저것 혜택도 드릴게요.”

연회비 면제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도 않은 혜택 정도의 제안은 제 마음을 바꾸는 데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더군요.
“실제로 00카드를 한 장 사용하기도 하고요. 현재로서는 더 카드를 만들 필요가 없네요. 미안합니다.”
“제가 기본급도 없는 영업 사원이라서 그럽니다. 하나만 좀 부탁드릴게요.”

요령이라고는 전혀 없는 영업 사원과 나누던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자 가슴 속에 뭔지 모를 것이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요즘 경기가 안 좋다더니 힘든 사람이 참 많구나 하는 단순한 동정심이나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대할 때의 거리감과는 또 다른 어떤 감정. 대학 시절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주워들었던 스스로가 가마우지인지도 모르고 착취당하고 있는 불쌍한 이웃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막연한 분노와도 또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카드가 필요하면 다시 연락을 드린다는, 아마도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하고 책상 서랍 한 구석에 그분 명함을 던지듯 집어넣은 후에도 개운치 않은 느낌은 여전히 가시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일과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와 습관적으로 틀었던 TV에는 마침 홈쇼핑 광고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화려한 화면과 신나는 음악, 그리고 진행자의 현란한 상품 소개. “저희는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행복을 드리기 위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하고 모두가 외치고 있는 홈쇼핑을 보고 있자니 사실 별 필요 없는 물건임에도 구입하면 참 좋겠다하는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래 영업은 저렇게 해야지 아까 그분은 너무 심하긴 했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하루 종일 제 가슴을 누르고 있던 감정의 정체를 알 것 같았습니다.

사실 홈쇼핑의 진행자와 저를 찾아왔던 영업 사원 모두 말하고자 하는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저를 위해 이 물건을 구입해 주십시오.” 하지만 홈쇼핑에서는 세련된 어휘와 여러 연출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본질은 가능한 한 숨기면서 사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넘긴다고 위하는 척을 했던 것이죠.

자본주의라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모두 영업인이 되어서 본질을 숨기고 스스로를 멋지게 포장해서 꼭 필요치 않은 소비를 하도록 상대를 설득하는 세련됨이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밴 듯합니다. 친구를 대할 때도 연인을 대할 때도 본질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모두가 당황하고 본래의 뜻은 숨긴 채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얼마나 잘 포장하는지가 그 사람의 능력의 척도가 되어 버린 세상.

그 세상에 잘 적응하고 살아가고 있던 저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서두 없이 본질을 모두 보이는 대화를 시도했으니 저도 모를 당혹감과 놀라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벌거벗은 채 누워 있던 디오게네스와 처음 만났을 때 알렉산더가 느꼈을 당혹감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오늘 아침 출근을 하자마자 원장실 서랍을 열고 어제 봤던 00카드 영업 사원의 명함을 꺼내서 명함을 모아 놓는 지갑으로 옮겨놓았습니다. 훗날 카드가 필요한 상황이 온다면 "저를 위해 카드 한 장 만들어 주세요." 라는 관계의 본질에 충실한 영업 사원을 통해 만들고 싶어졌습니다.

1979년 서울 출생. 단국대 치대 졸.
2008년 <한맥문학>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치과의사 문인협회 회원.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2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오마리 (1.XXX.XXX.82)
잘 포장되어 오히려 인기를 끌고 그 포장 때문에
비어있는 모습을 감추어야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런 시대에 조금 울분도 느낍니다.
마음이 찌르르 울리는 내용 한 해가 져무는 이 때 고맙습니다.
답변달기
2011-12-09 17:41:47
0 0
신아연 (110.XXX.XXX.249)
사회 현상에 대한 따스하고 통찰력있는 글, 맛깔스런 글, 잘 읽었습니다. 평소 제 생각과 같아서 깊은 공감을 느낍니다.
답변달기
2011-12-07 10:02:55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