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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돈 쿠컥을 회상하며
권대욱 2012년 01월 05일 (목) 00:06:04
걷습니다. 걷다보면 생각이 나고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정화됨을 느낍니다. 틱낫한 스님의 걷기명상과 이생진 시인의 성산포도 그렇게 탄생됐을 겁니다. 과거 없는 오늘은 없습니다. 오늘 새벽 길을 걸으면서 그 옛날 27년 전 요르단 시절이 생각난 건 글로벌 경영이라는 이 시대의 화두가 원인이었을 터이지만 오늘의 편안함과 풍요로움 뒤에 준엄히 자리한 과거 어렵던 시절의 극기와 희생, 또 못 먹고 못살던 시절의 애환을 잊지 않으려 함이겠습니다.

그 시절 미국의 한 노(老) 엔지니어가 제게 보여준 투철한 직업정신과 약자에 대한 배려, 그리고 타협하지 않는 정의가 오늘날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만든 저력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 글로벌 스탠다드를 향한 우리 기업들의 노력,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엄격히 직업윤리를 지키겠다는 경영자들의 의지만이 우리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우리는 흔히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괜찮은 사람, 형편없는 사람 등으로 구분하곤 합니다. 모두가 주관적 판단이며 그렇다 보니 실수할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람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결코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요르단 지사장으로 근무하던 때의 일입니다. NJ-2(North Jordan Domestic Water supply Project contract No. 2 Water Treatment Plant) 현장에 도널드 쿠컥(Donald Kukuk)이라는 감독이 있었지요. 미국인이고 당시 나이 60이 넘은 엔지니어였습니다.

현장 이야기를 듣자 하니 이 사람이 천하에 고약한 감독이었습니다. 사사건건 스펙(시방서)만 따지고 현장의 편의나 현실을 전혀 들어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가뜩이나 지지부진한 공정이 그 때문에 더욱 더뎌져 그가 있는 한 공사가 제때 끝날지 모르겠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더냐고 물어보면 설명도 잘 않고 그저 ‘미친 쿠컥’(Donald의 약자 Don을 돌아 버린 돈으로 빈정거림)이라 미친 짓만 한다고 몰아붙이기 일쑤였습니다. 말단 직원들을 살살 꾀어 알아보니 주로 시방(示方)이나 계약조건의 해석에 원리원칙을 고수하고 어떤 타협이나 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게다가 엄청나게 부지런하여 사람을 못살게 군다는 것입니다. 현장 소장 이하 대부분의 직원들이 그리 이야기하니 저 또한 그런 줄로만 알았지요.

제가 직접 만나보려 해도 현장 사람들이 극구 반대하니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지사장을 만나면 앞으로는 지사장만 상대하려 할 테고 그리 되면 현장만 죽어나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현장에서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답답하지만 우선은 그대로 둘 수밖에.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암만에 있는 지사 사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웬 서양사람 하나가 불쑥 들어섭니다. 잘 정돈된 은발에 나이는 60 정도, 키도 크고 단정한 아일랜드풍의 노신사였습니다.

"Hi! Mr. Kwon! Good to see you. My name is Donald Kukuk. I'm working for North Jordan Water Treatment Plant as a chief resident Engineer for Stanley consultant. I‘ve something to tell you about the site. Can you spare some time for me?”
(안녕, 권 지사장님! 나는 돈 쿠컥입니다. 스탠리 컨설턴트의 NJ-2프로젝트 책임 엔지니언데 현장 일로 할 이야기 있으니 시간 좀 내 주시지요.)

그와의 첫 대면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현장에서 시방서대로 일을 하지 않아 애로사항이 많고 결국 이것은 회사의 손실로 직결되는 만큼 계약규정을 잘 준수해 달라는 요지였습니다.

시정을 지시했고 이후 그의 지사 출입은 잦아졌습니다. 용무도 다양해서 계약조건상 이런 저런 권리가 있는데 왜 너희들은 찾아먹지 못하느냐? 기성지불이 늦어지면 이자를 청구해라. 스펙(spec)에 어떠어떠한 자재를 쓰라고 돼 있어도 그와 같거나 더 좋은(equal or better) 품질이라면 설계변경도 가능하다… 등등 우리를 생각해 주는 공식적인 업무 상담으로부터 현장 미스터 김이 장가간다더라, 발주처의 누구누구는 어떻더냐? 한국 김치를 집사람이 만들고 싶어 하는데 도와줄 수 있나? 등등 사적인 일까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귀찮고 성가실 만도 하지만 그의 진심은 우리를 도와주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인을 좋아하고 그들이 자신의 권리, 의무를 잘 챙겨가기를 바라는 노(老) 엔지니어의 마음에는 사심(私心)이 없었습니다. 현장공사가 끝날 때까지 우리가 그에게 해줄 수 있었던 일은 중국 음식점에서 밥 한 끼 먹은 일과 그의 부인 생일에 선물한 15,000원짜리 노리개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그 이상을 그는 허용치 않았고 우리도 그의 진심을 곧 알아차렸습니다.

그가 미국 본사로 전근 갈 때까지 공사기간 내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로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객지에서 마음 터놓고 의논할 상대마저 없었던 외롭고 고독한 결단의 순간마다 그는 나의 조언자요 동반자였습니다. 명실상부한 컨설턴트였던 셈이지요.

돈 쿠컥, ‘미친 쿠컥’이라 불리던 그가 현장 직원들이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되기까지 그는 계속 용감했고 단호(斷乎)했으며 문제가 될 일도 사후에 지적하기보다 사전에 예방했습니다. 진심으로 직원들을 사랑했고 아파했습니다. 돈 쿠컥! 그의 인자한 미소가 그립습니다. 지금 90을 훨씬 넘겼을 그,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지금도 이웃들에게 이것저것 참견하며 손자들 재롱에 해맑은 미소를 날리고 있을까요? 어디에 있든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권대욱
중앙고 졸업. 서울대에서 농업토목을 전공했다. 한보종합건설을 비롯, 유원건설, 극동건설, 효명건설 등 건설사 국내외 현장을 지휘했고 CEO를 역임했다. 현재는 (주)아코르-앰버서더 코리아 호텔 매니지먼트 사장으로 재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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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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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115.XXX.XXX.236)
역시 양키들의 원칙주의는 대단합니다. 지금 그런 원칙이 무너지면서 미국이 고전하는 게 아닐까 혼자 짐작해봅니다. 외국 합작법인에서 근무한 분들의 회고를 들으면 그들이 얼마나 원칙에 충실했는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공무 중에도 핸드폰으로 노닥거리지를 않나, 아예 자판기 앞에서 모여서 수다 경진대회를 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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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3 15:42:02
0 0
libero (112.XXX.XXX.104)
고달펐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던 시대였지요. 어느 분야에서나 오늘날과 같은 발전이 있기까지 참으로 눈물겹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산처럼 바다처럼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좋을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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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7 14:18:41
0 0
권대욱 (59.XXX.XXX.224)
그렇습니다 늘 그 시절을 치열하게 살았음을... 그리고 회상할 수 있음을
고맙게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같이 느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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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8 11:54:14
0 0
함철훈 (211.XXX.XXX.129)
물 흐르듯 편안하고 잔잔한 여운을 주는 권대욱님의 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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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5 09:49:36
0 0
권대욱 (203.XXX.XXX.247)
감사합니다 그리 읽어주셔서 28년전의 기억이 오늘도 새록합니다
좋은 날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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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6 09:13:21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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