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 전입자’들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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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 전입자’들의 전성시대

허영섭

2012년 04월 30일 (월) 00:53:06

고위 공직자들에 있어서 위장전입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핵심적인 자리에 임명되는 사람마다 거의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항목입니다. 그러다 보니 엄연한 실정법 위반인데도 죄책감조차 상당히 무뎌진 것 같습니다. 그냥 몇 마디 정도의 의례적인 사과 표명으로 어물쩍 넘어가게 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이번에 새로 문제가 된 것은 김기용 경찰청장 후보자의 위장전입 전력입니다. 그가 용산경찰서 서장으로 재직하던 지난 2006년 허위로 주민등록을 이전했었다는 것입니다. 본인도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그가 경찰 지휘관으로 현장에서 범죄자 단속에 앞장선다고 하면서 스스로 법을 어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합니다.

국회의원에 당선되고도 성추행 논란과 논문표절 의혹이 연달아 제기되면서 김형태·문대성 당선자가 여론의 압력에 못이겨 새누리당에서 쫓기듯이 탈당해야 할 만큼 국민들이 공직사회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마당입니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도 후보 검증이 철저하지 못했다며 공식 사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위장전입은 본인의 사과와 해명만으로 충분히 용인될 수 있다는 것일까요.

내일(5월 1일) 국회의 인사청문회가 열릴 예정이지만, 총선이 끝난 뒤끝이라 의원들도 그렇게 관심이 있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민생법안을 처리하려던 본회의조차 정족수 미달로 무산된 것을 보면 청문회도 형식적 절차로 끝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사실은, 청문회에서 결격사유를 밝혀내도 청와대가 임명을 강행했던 것이 거의 한결같은 전례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인사청문회에 등장했던 국무총리나 장관, 권력기관의 책임자들이 대부분 위장전입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는 점이 더욱 심각합니다. 법 집행에 엄격해야 하는 대법원장이나 검찰총장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공정사회를 지향한다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입니다. 이러고도 도덕적으로 완벽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국민들이 코웃음을 치는 것이겠지요. 허탈감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과거 김대중 정부 시절 장상·장대환 씨가 국무총리 지명을 받고도 위장전입 전력으로 도중에 하차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우리의 도덕적 기준이 느슨해진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물론 그들에게 다른 의혹도 함께 제기됐지만 의혹의 출발점은 역시 위장전입이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도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위장전입으로 인한 투기의혹 논란 끝에 자진 사퇴하기도 했습니다.

위장전입에 관련된 공직자마다 대체로는 자녀의 학교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자녀의 학교 전학을 위해 부득이 남의 집으로 주소를 옮겨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번 김기용 경찰청장 후보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1977년부터 1984년까지 4차례에 걸쳐 자녀들을 사립초등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위장전입을 했던 것으로 밝혀진 바 있습니다.

누구라도 학부모의 입장에서 자녀의 교육문제에는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겠지요. 한순간의 선택이 자녀의 평생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지위와 돈이 있는 지도층일수록 위장전입이라는 편법에 기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녀교육에 관심이 있더라도 사회적 여건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위장전입을 하고 싶어도 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위장전입이 그 자체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부동산의 편법 취득이나 토지보상, 위장 영농으로 이어지기 십상입니다. 주민등록법상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매기도록 한 것도 그런 불법행위를 막자는 뜻이겠지요. 그동안 고위 공직자들에 있어서도 아파트 편법매입 등 부동산 거래의 목적으로 위장전입을 했던 의혹이 번번이 지적되곤 했습니다.

지도층 인사들이 그런 식으로 위장전입을 해가며 자녀교육에 공을 들이고 아파트 평수를 늘려가는 동안 일반 국민들은 취업난과 전세난에 곤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의대나 법대에 진학하고 외국 유학을 하는 등 교육 수준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는 만큼 다음 세대에서는 격차가 더 벌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도 위장전입에 대해 언제까지 너그럽게 눈을 감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혹시 과거엔 상류층에서 대체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용인이 될 수 있는 명백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던 1993년부터 공직자 재산등록 시작과 함께 위장전입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란을 빚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뒤에 이뤄진 위장전입은 공직자로서의 기본 양심과 자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위장전입자들이 버젓이 활개치고 다니는 시대는 사라져야 합니다. 고위 공직자 후보들마다 위장전입 경력을 태연한 듯이 꺼내놓는 모습이 마땅치가 않습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여간 자존심 상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귀중한 세금으로 왜 위장전입자들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기고 봉급을 주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위장전입자가 아니라면 인재가 없다는 것일까요.

내년에 출범하는 새 정부가 획기적인 전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대선에 나서는 후보들마다 자기가 당선될 경우 적어도 자신의 임기 동안만큼은 위장전입자는 중요 직책에서 완전히 배제시키겠다는 공약을 제시하기를 바랍니다. 또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각오가 없다면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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