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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의 초록 스케치
안진의 2012년 07월 17일 (화) 00:42:51
여름비가 종일 창문을 두드립니다. 오대산 자락 한국자생식물원 산책로로 향하는 발걸음은 빨라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산수국이 더욱 아름다울 때는 지금처럼 비가 하늘을 가리거나, 밤으로 가는 저녁 무렵입니다. 하늘을 닮은 빛에서부터 비밀스런 땅의 기운처럼, 보랏빛 산수국이 다양한 뉘앙스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비가 흔들어 놓고 난 다음 산수국 향은 더욱 짙어만 갑니다.

   
비를 머금은 보라빛 솔체꽃도 낮게 피어 가늘게 떱니다. 봉벌에도 나비에도 태연하던 꽃잎들이 빗방울에 하염없이 리듬을 탑니다. 비가 잠시 멈추자 딸아이가 스케치북을 들고 나섰습니다. 아이는 관찰일지를 쓴다고 하였습니다. 흰양귀비의 키를 재고, 수채물감을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솜털이 난 줄기를 관찰하고 흰 꽃잎과 동그란 씨방, 낮게 핀 잎을 그립니다.

이번엔 채집을 한다고 합니다. 채집할 때는 식물을 뽑아 버리거나 괴롭히는 건 금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땅에 떨어진 꽃잎을 주우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빗물에 떨어진 산수국의 보랏빛 양성화는 너무나 작아 줍기조차 힙이 듭니다. 노란 참좁쌀풀 꽃잎이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 즐거워합니다. 흰 옥잠화 꽃잎과 노란 원추리 꽃잎을 몇 개 주워들고 의기양양해졌습니다.

여름이면 나리꽃이 한창이어야 하는데 나리꽃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한겨울 배고픈 멧돼지들이 내려와 나리꽃 구근을 죄다 파먹었다더니 그래서인가 봅니다. 간혹 가녀린 꽃대 위 하늘로 꽃잎을 낸 하늘말나리, 옆으로 꽃잎을 낸 말나리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너는 살아 있었구나.’ 반가움이 앞섭니다. 지린내 나는 쥐오줌풀이나 누린내풀처럼 향기를 무기처럼 갖고 있었으면 어떠했을까 아쉬운 생각도 듭니다.

아니 사극에 종종 나오는 사약의 재료인 투구꽃이나 할미꽃 뿌리였다면 더욱 안전했을지 모릅니다. 넓은 잎 한 장을 뜯어 뒷간에 던져 놓으면 구더기가 금방 없어진다는 독성 강한 박새였다면 어떠했을까요. 알고 있는 독성식물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봅니다. 그러고는 비에 젖지 않은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자연 체감 결핍증이라도 걸렸던 듯 ‘좋다. 자연이 좋다.’를 읊조립니다.

그 새 아이는 플라스틱 음료수통 밑바닥을 자르고 비닐 랩을 씌워 물속을 들여다보는 잠수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웅덩이 생물을 관찰하러 뛰어 나갑니다. 계곡물 콸콸거리는 소리가 막혔던 가슴을 뚫어주듯 시원합니다. 잠시 빗발을 피했던 풀벌레들도 바스락 소리를 내며 뛰어갑니다. 멀어져 가는 아이가 꽃밭을 뛰다 멈춰 웅크리고 있다면 그건 벌이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유독 벌만 무서워하여 뛰다 멈춤을 반복하는 딸아이의 모습에 눈이 웃습니다.

   
  산수국  
깊이 마신 싱그러운 공기에는 백 리 밖까지 퍼진다는 분홍빛 섬백리향의 은은함이 알싸한 흙내음과 섞여 있습니다. 자욱한 안개에 싸인 오대산 산그늘에서 소나무가 주는 초록의 공기를 뒤집어쓰고 마시는 일(green shower), 삼림욕은 숲과 내가 서로 다른 몸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한적함, 편안함, 숨쉬기의 즐거움이 느껴지는 비오는 날의 산책입니다.

아이가 뛰어와 왕거미와 배추흰나비를 찾았다며 수선입니다. 다시 자연탐사를 나서자는 아이의 칭얼거림에 입이 웃습니다. 이 여름비에 젖은 자연을 만지러 나갑니다. 발끝, 손끝에서 만나는 자연을 느끼며 흙길을 밟아 봅니다. 곧 이 여름비에 분홍바늘꽃은 흔적을 감춰가고 술패랭이, 벌개미취들이 진동을 할 듯합니다. 비오는 날은 비가 와서 그 풍미가 더욱 짙어지는 초록빛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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