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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뢰매
신아연 2012년 07월 19일 (목) 00:50:26
우연히 시작된 친정 조카와의 메일 주고받기가 새로운 일상이 되면서 사는 재미가 늘었습니다. 외국에 사는 이모에게 집안을 대표하여 후투루 안부를 전하는 내용이 아닌, 순전히 저하고 나하고의 생각과 속엣말을 나누는 ‘은밀한 편지질’이 늦게 배운 도둑질마냥 꼬숩고 맛납니다.

어렸을 적 빼고는 이민 온 후, 간간이 한국에 갈 때 얼굴이나 보던 조카를 어른이 되어 이메일로 다시 만나니 되살아 난 피붙이의 온정이 되작거린 화로처럼 은은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조카와의 이메일 대화가 이어지면서 그 자체의 즐거움과 더불어 한 사람의 인품이 여물어가고 인격이 성장해 온 과정을 엿보는 가슴 뿌듯함의 덤을 얻습니다. 제 기억 속의 조카는 그저 철부지인데 그 철부지가 이렇게 반듯하게 자랐다는 게 그렇게 대견할 수가 없습니다.

“이모를 생각하면 롯데리아에서 치킨을 사 주던 기억이 제일 먼저 떠올라. 누나랑 뉴코아에 <우뢰매>를 보러 갔는데 영화는 못 보고 치킨만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닭다리의 물렁뼈까지 몽땅 뜯어 먹는 모습에 이모가 놀라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해.”

어느 날 조카는 저와 함께한 유년의 한 조각을 이런 말로 꺼냈습니다. 그 아이가 무심코 한 말에 기억의 빗장이 풀릴 듯 말 듯, 아슴아슴 떠오르는 시간의 편린들이 마음을 휘지르며 느닷없이 그 소리가 제게는 아릿아릿한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왜 그때 우리는 <우뢰매>를 보질 못했을까, 신나서 따라 나섰을 애들이 얼마나 실망했을까, 그나마 닭고기를 먹어서 서운함이 좀 가셨을까, 아니지, 원래는 영화도 보고 닭도 먹을 계획이었을 거니까 그렇지도 않았겠네. 다음에 꼭 다시 보여주겠다고 약속을 했을까, 그랬다면 영화를 본 기억을 말해 주었을 텐데, 아마 아니었나 봐...’

아무리 되돌리려 해도 이미 ‘공소시효’ 지난 일들, 어쩌면 회한의 ‘건덕지’도 못되는 것을 부여잡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듯 참회록을 쓰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이미 성인이 되었음에도 조카에게는 이렇듯 생생한 일이 제 뇌리에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당혹감과 무심함이 그 하나이고, 이렇게 훌쩍 커버릴 줄 알았으면 어릴 때 좀 더 놀아줄 걸 하는 후회와 미안함이 또다른 이유였습니다.

생색내지 말자며 일부러 잊으려 노력했을 리는 없고, 마지못해 데리고 나갔건, 모처럼 선심을 썼건 기대에 가득찼을 애들의 달뜸에는 아랑곳없이 제게 그 시간은 그다지 의미 있지도 중요하지도 않았던 게지요. 그러지 않고야 한쪽은 성장의 갈피에 선명히 찍혀 있는 장면이 한쪽은 무망(無妄)의 어이없음 속에 놓일 수 있을까 말입니다.

놀아달라고 떼를 쓰는 어린 아들에게 졸리다 못해 날을 잡아 하루를 보내 준 어느 아빠의 잡기장에는 ‘오늘은 완전 공쳤다. 시간 낭비에다 아무 것도 한 게 없다.’ 라고 쓰여 있는 반면, 같은 날 꼬마는 ‘ 오늘은 진짜 기분 좋은 날, 맨날 오늘처럼 신나는 일만 있으면 정말 좋겠다.’며 만족과 기쁨에 겨운 그림일기를 썼다는 이야기와 제 경우가 꼭 닮았습니다.

다른 메일에서 조카는 “아란이가 사춘기 때 이모가 메일로 말상대 해줘서 위로가 많이 됐었대.” 라는 뜬금없는 말로 저를 또 한 번 부끄럽게 했습니다. 아란이는 제 다른 언니의 딸인데 그 일은 비교적 최근 일이라 기억을 못하지는 않지만, 제 딴엔 힘들어서 말을 걸었는지 몰라도 저는 역시 별 생각이나 큰 노력없이 그때그때 대꾸해주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몸에 영양을 제대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비타민이나 무기질 섭취가 필수적이듯이, 자애로운 부모의 다사로운 보살핌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운좋은 사람도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는 이모나 고모, 삼촌의 양념같은 역할이 꼭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양념을 헤프게 쓸 필요는 없듯이 잊은 듯 무심히 동심 속에 작은 불씨 하나만 던져 두면 어떤 아이들은 그 불씨를 생기 삼아 이담에 화톳불을 피우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점점 악해져만 가고 가정과 학교, 사회가 온통 덫인 양 벼랑 끝에 위태위태 서 있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저의 보잘 것 없었던 ‘우뢰매’나 ‘통닭’에도 시큰둥, 무감동할 것 같아 이런 말을 하는 자체가 솔직히 옹색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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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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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옥 (110.XXX.XXX.229)
유년의 추억이 평생 살아가는 자양분이라고 생각 할 때가 많습니다.
오정희씨의 단편들에서 애잔한 유년의 풍경들은 戰後의 어렵던 시절 소녀가 보고 느꼈던 부끄럽고 슬펐던 추억이 아름답게 읽는이를 오래도록 잡습니다.

잘 놀아주는 손녀와의 한 때가 그애의 맘속에 따뜻하게 남기를 바라는 마음도 같은맥락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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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3 23: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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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60.XXX.XXX.96)
marius님. 우리 말의 아름다운 표현들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함께 이쁘다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람의 소통은 그러나 말보다는 유순한 마음과 사랑이 선행되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런 마음을 내기가 현대는 좀체 어렵다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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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1 13: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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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아연 (60.XXX.XXX.96)
인내천님, 그렇지요, 더구나 어려운 시절의 어린 시절은 그 달콤한과 아련함이 더하겠지요. 모두들 살기 힘들 때 참 사려깊고 정깊은 어른들이 아이들을 챙겨주는 것은 스스로의 생각 이상으로 귀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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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1 13: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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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us (220.XXX.XXX.168)
'아슴아슴' '후투루' '휘지르며' '꼬습' '디작거린' '아릿아릿한' '달뜸' 이런 말들이 이쁘기도 하고 그래서 내 노트에 적어두었습니다. 표현이 다정하고 너무 좋습니다. 그러기에 그분도 글을 주고받지 않았겠습니까. 열량이 그만하니까 그렇게 했을겁니다. 나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렇게 글나누는 사이를 많이많이 벌려나가시는 것도 훌륭한 재능기부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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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9 1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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