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 두껍고 속 검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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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 두껍고 속 검어야?

김홍묵

2012년 10월 08일 (월) 00:59:51

면후심흑(面厚心黑). ‘두꺼운 얼굴과 시커먼 마음’을 갖춰야 난세에 살아남는다는 후흑학(厚黑學)의 요체입니다. 청나라가 망하고 신중국이 탄생하는 즈음에 이종오(李宗吾)가 내놓은 흑후론은 두꺼운 낯짝을 방패로 삼고, 시커먼 속내를 창으로 삼아 난세에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마디로 철면피가 되라는 말입니다. 명분과 의리가 아니라 간계와 실리를 강조한 후흑학은 학문이라기보다 처세술이라 함이 맞을 듯합니다.

중국사를 탐구하여 후흑의 실체를 발굴해낸 이종오는 실례로 유방(劉邦)을 들었습니다. 항우(項羽)와의 전투에서 대패한 유방은 가족도 팽개친 채 도망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항우가 “항복하지 않으면 네 아비를 죽여 탕을 끓이겠다”고 하자 유방은 “그 국물이나 한 그릇 보내 달라”고 능청을 떨었습니다. 끝내 전국을 통일하여 천하를 제패한 유방은 공신 한신(韓信)을 역모로 몰아 토사구팽(兎死狗烹)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후흑은 세 단계를 거쳐야 완벽의 경지에 이른다고 합니다. 첫째는 얼굴이 두꺼워지고 뱃속이 까매지는 단계. 둘째는 얼굴의 두꺼움이 창칼로 뚫을 수 없는 두께를 갖고, 뱃속의 검은색이 광택을 내는 단계. 셋째는 얼굴이 전혀 두껍지 않아 보이지만 절정의 두께를 지니며, 뱃속의 검은 색은 오히려 투명해져 사람들이 오히려 성인으로 떠받들게 되는 최상의 단계라고 합니다.

전국시대의 지록위마(指鹿爲馬) 차호위호(借虎威狐)같은 고사는 후흑의 절정을 이루는 성어들입니다. 진(秦) 시황(始皇)의 환관 출신 측근 조고(趙高)는 유언을 날조하여 장남 부소(扶蘇) 대신 차남 호해(胡亥)를 왕위에 앉혔습니다. 갖은 아첨과 참언을 다하여 승상에 앉은 조고는 어린 왕을 꼬드겨 경쟁자인 이사(李斯)를 죽이고 선제 이래의 대신과 장군들을 살육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신인들을 대거 등용했습니다.

조고는 그 신인들이 호해 편인지 자기 편인지를 확인해 보려고 야릇한 트릭을 부렸습니다. 2세 황제에게 사슴을 헌상하면서 “말을 헌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황제는 “승상은 묘한 말을 하는군. 사슴을 말이라고 하다니”하고 좌우를 둘러보았습니다. 신하들 중에는 말이라고 하는 자, 고개만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자가 대부분이었지만 사슴이라고 직언했다가 죽임을 당한 이도 있습니다. 후로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指鹿爲馬)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신하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대 초(楚)나라 선왕(宣王)이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북방 오랑캐들이 우리의 재상 소해휼(昭奚恤)을 두려워하는가?” 왕의 측근 강을(江乙)은 즉각 이를 부정했습니다. “북쪽 나라들이 두려울 것은 초나라 군대, 즉 폐하의 강병이지 결코 소해휼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차호위호의 고사를 들어 이야기했습니다.

여우가 어느 날 백수의 왕 호랑이에게 붙잡혔습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여우는 꾀를 내 호랑이에게 말했습니다. "천제(天帝)께서 이 여우를 백수의 장으로 정하셨다. 만약 그대가 나를 잡아먹으면 천제의 뜻에 반하게 된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내 뒤를 따라와 봐라. 도망치지 않는 짐승이 한 마리도 없을 테니." 호랑이가 여우를 앞세우고 뒤따라 가 보니 과연 온 산의 짐승들이 부리나케 달아났습니다. 여우 뒤에서 걸어오는 호랑이가 무서워서.

소해휼을 영신(佞臣)으로 폄훼한 강을은 원래 위(魏)나라 사람으로, 사신으로 왔다가 초나라의 신하로 종사하여 왕의 총신(寵臣)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은밀히 위와 내통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소해휼은 초의 왕족 출신으로 명망이 높은 대대의 충신입니다. 강을은 소해휼이 자신의 간첩활동을 눈치챈 것을 알고는 왕에게 "호랑이의 위엄을 사칭하는 여우다" "뇌물을 받았다"며 고자질했습니다. 자신이 호랑이의 위엄을 얻기 위해.

낯 두껍고 뱃속 검은(厚黑) 사람과 얼굴 얇고 양심 있는(薄白) 사람을 구별하기는 참으로 힘든 것 같습니다. 입만 열면 ‘국민’을 들먹이고, 불의(不義)만 보면 참지 못하는 듯 사자후를 내뿜던 작자가 검은 돈을 탐한 끝에 쇠고랑을 차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인명을 살리고 빈민을 구제하겠다는 치들이 법과 제도를 악용하여 국고를 축내는 작태들이 널려 있으니 말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후흑의 뒤끝은 불행하거나 비참합니다.

싫든 좋든 우리는 70일 후면 또 다른 이 나라의 지도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런 저런 거르기 작업 끝에 3파전의 형태가 됐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눈길을 끄는 이는 정치 문외한으로 일컬어지는 안철수 후보(전 서울대 융합과학대학원 원장)입니다. 아랫입술이 도톰한, 천진난만한 얼굴로 차분하게 펼친 그의 대통령 선거 출마의 변은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열변도 웅변도 아니지만 그의 인기는 기성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반작용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정치의 목적은 집권입니다. 집권을 위해서는 선동 흑색선전 음해 비방 테러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개인 비리뿐만 아니라 조상과 계보까지 다 들춰냅니다. 그러면서 재원도 가능성도 확실하지 않은 달콤한 공약을 쏟아냅니다. 그리곤 국민의 편임을 자처합니다. 번번이 속아왔지만 이번엔 제대로 뽑을 수 있을지. 번지르르하고 달콤한 언변과 입맛 돋우는 약속에 현혹되지 않고, 책임질 줄 아는 인물을 고르는 책임은 국민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