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마늘_(김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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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늘

김창식

2013년 05월 29일 (수) 01:08:03

"아범아, 흑마늘을 좀 먹고 싶구나."
"아니, 아버지. 흑마늘은 왜요?"
내가 떨떠름해 하자 아버지가 덧붙이셨어요.
"나가 그 뭐시냐 다 요량이 있어서 그런다."

신문에서 그 무렵 집중적으로 선전하는 '흑마늘 진액 100% 어쩌고…' 하는 건강식품 광고를 보신 모양이었어요. 기력 증진, 항암 효과, 간 기능 강화, 혈액순환 원활, 알레르기 체질 개선 등 좋은 말은 다 쓰여 있어 연세 드신 분들이 혹하시겠더라니까요. 난 아버지의 말을 흘려들었죠. 아니, 그 연세에 흑마늘은 무슨?

아버지는 당시 81세로, 어머니가 먼저 떠나 홀로 계신지 3년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손꼽는 K고보 출신에 B전문대학 법과를 나오셨지요. 아버지의 성품이나 기질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한 가지 일에 꾸준하다거나 진득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여려 유형의 사업에 손을 댔는데 실패를 거듭했어요. 고무공장, 극장, 다방, 목장…. 급기야 정치에 뜻을 두어 고향인 S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시기도 했으니, 정치 입문의 실패는 가세 몰락을 가져온 단초가 되었죠. 그것이 전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아버지와 장남인 나는 사이가 썩 돈독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뭐 대놓고 대립하는 것은 아니었고 어머니에 비해 그랬다는 것이에요.

대체적으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도타운 편이 아닙니다. 프로이트는 그 이유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들어 설명했지만, 예술 작품에 나타난 부자관계 역시 전통적으로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아래 소개하는 예들이야 지나친 감이 있지만, 카프카의 '변신(Die Verwandlung)'에서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은 상처가 곪아 생을 마감하고, 같은 작가의 '선고(Das Urteil)'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인 게오르크 벤데만을 밑도 끝도 없이 비난하며 익사형을 선고하죠. '스타워즈 (Star Wars)' 시리즈를 볼까요? 악의 화신인 다스 베이더는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의 필생의 적인데,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였다니까요. 다스 베이더가 자신을 희생해 죽어가며 루크에게 일러주던 유명한 대사가 생각납니다. "I'm your father!"

아버지는 분주(奔走)하고 신산한 삶을 산 분이었지만, 연로하여 모시게 된 당시는 기력을 잃고 지병까지 겹친 애처로운 노인일 뿐이었어요. 아버지의 흑마늘 복용 소원을 어떻게 처리할까 궁리하는 새 2~3일이 지났습니다. 아무래도 노인 부탁을 들어드리는 것이 도리이겠거니 싶어 상품 구입을 결정하고 다음 날이면 배달하기로 약조가 되었지요. 그날 저녁 아버지는 저녁 식사를 하시던 중 숟가락을 떨어뜨리더니 식탁에 얼굴을 묻으셨어요. 호흡이 거칠고 몸을 가누지 못하셨는데,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길이었답니다.

이제야 떠올리지만, 아버지의 머뭇거림, "으음~" "에~" 간투사형 말투, 공허한 눈빛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의 시작이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얼마 전부터 "아범아…" 무슨 말을 하실 듯 그만 두어 버리시거나 물끄러미 쳐다보시다가 눈길을 돌리곤 하셨어요. 자식 부부의 눈치를 보신 것이죠. 나는 그처럼 풀 죽은 아버지에게 또 화가 났고요. 아버지는 혼란스러워하거나 마뜩치 않은 표정을 짓는 일이 많았어요. 거실에 우두커니 서 계시다가 방으로 들어가시곤 하셨지요. 아버지는 그때 긴 이별을 준비하고 계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이 글을 쓰는 본인도, '어디다 영혼을 팔며 버티어 낸'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 노릇 한지가 어언 30여년이 넘었습니다. 33세의 큰아들과 둘째이자 막내인 10년 차 23세의 작은 아들이 있거든요. 뭐 아들들과의 관계가 그다지 친밀한 것은 아닙니다만. 근데 아버지라는 사실이 아직도 서먹하기만 한 것을 보면 나는 여전히 '견습 아버지' 인 모양입니다. 요즘 21세기 형 아버지는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자녀와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데 말입니다. 아참, 그 흑마늘! 문제의 상품은 판매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반품, 환급을 받았어요.

김윤옥 (39.XXX.XXX.180)

세상의 아버지들은 가족을 위해 평생을 바쳐도 가족의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겉돌다 마는지...
제 아버지도 늘 그랬습니다. 늘 덤덤한 무표정의 아버지..지금 아버지 나이를 훌쩍 넘기고서야 아버지도 계절 따라 피고지는 꽃을 보셨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도 아름다운 것, 맛난 것, 좋은 것, 즐거운 것, 다 함께 하신다는 것, 이제야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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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3 15:5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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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XXX.XXX.149)

김윤옥님 말씀 절절히 와닿습니다.
가족의 중심에 위치하면서도 항상 겉돌던 우리 시대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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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4 20: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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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opco (117.XXX.XXX.178)

40세 이후 어쩌다 보니 해외 생활이 더 많아져...
어느날 아버님이 제 앞에서 관에 들어가시고 땅에 묻히셨어요.
장남인 형님과 달리 차남인 저는 불만들을 그래도 많이 말씀드린 편이었지만 지금 보니 많은 것들은 저의 어린 탓이었지요.
언젠가 꼭 그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내내 시간을 가지려 했는데...
지금도 아직 그곳에 계셔서 전화드리면 받으실 것이라는 착각이 들때가 있지요. 딸과 아들을 보면서 제 인생의 복습을 하고 아버님의 모습을 보면서 제 인생의 예습을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앞으로 제가 살아가며 배우는 것이 아버님께서 저승에서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겠지요. Tears in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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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3 13: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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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XXX.XXX.149)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utopco님. 공감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누구의 아들이거나 다른 누구의 아버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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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4 20: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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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159.XXX.XXX.15)

글을 읽고 콧잔등이 시려왔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다시 뵙는 듯 했고 제가 아버지께 가졌던 감정을 다시 생각나게 해서 하루종일 먹먹했습니다. 제가 동료들에게 글을 돌렸는데 다들 본인 이야기같다고 하더군요...
항상 좋은글 즐겨 읽지만 이번 글은 특히 가슴에 와닿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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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30 09:4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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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식 (1.XXX.XXX.110)

봄날 선생님,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공감해주시고,
친구 분들과 함께 글을 보셨다니 부끄러우면서도 보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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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31 12:2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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