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안진의 마음결
     
숭례문과 우리의 빛깔
안진의 2013년 11월 07일 (목) 00:48:23
<한국근현대회화100선>을 보러 덕수궁미술관을 찾았습니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귀한 작품들을 감상하다 한 작품 앞에서 그만 발걸음을 멈추고 씁쓸함을 삼켰습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1934년도 <가을>이라는 작품입니다. 잘 알려진 운보의 활달하고 분방한 필치의 수묵화와는 다르게 너무나 섬세하게 다듬어진 채색 작품입니다.

그런데 인물의 흰 옷에 칠한 흰색의 호분이 그만 균열이 가고 박락이 되어 있었습니다. 호분은 풍화된 대합, 굴 등의 조개껍질을 빻아 만드는데, 밝고 명징한 흰색의 표현이 가능하여 사용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백색도가 높아지고 교착제인 아교를 밀어내는 성격이 있어 사용에 주의를 요하는 까다로운 재료입니다.

최근 숭례문 단청 박락의 큰 문제가 아교와 호분을 다루는 기술적 문제여서 마음이 착잡했는데, 여기서도 똑같은 문제를 보니 다시금 마음이 불편해져 온 것입니다. 사실 호분의 박리현상은 아교와 호분을 다루는 채색화 전공자들이 종종 경험하는 일입니다. 다른 곳들은 정교하고 아름답게 채색하였지만, 운보도 호분의 박리 현상을 쉬이 짐작하지 못하였던 모양입니다.

매스컴에서도 떠들석 했지만, 이 호분과 아교, 일본산 안료 등이 숭례문 단청의 문제요소로 제기되었습니다. 저도 11월 5일자 한국일보 사색의 향기에 짧은 글을 올렸지만, 이것으로도 마음이 충분하지 않아 다시 단청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숭례문 복원은 잃어버린 우리의 얼을 담는 일이었고 그 얼을 표현하기 위한 우리의 채색문화를 되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숭례문 전통 단청을 위한 교착제 연구나 천연안료 적용 방안에 관한 연구 등 그간의 노력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급한 공사일정에 실질적으로 적용 가능한 재료를 찾다보니 일본 안료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 전통 채색안료는 사실상 그 명맥이 끊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재료와 아교들을 수입하여 단청을 하면서 면밀한 검토 없이 복원하다 문제가 되었습니다. 돌 원석에서 채취하는 석채가 아니라 이번에 사용된 수간채색 물감은 백토에 화학염료 등을 섞어 만드는 분채로, 자칫 아교의 농도가 짙거나 물감이 두꺼워지면 박리현상이 더욱 쉽게 나타나는 재료입니다. 국보 1호의 복원은 돌다리를 두드려 보며 걷듯 신중해야 했지만 어이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임기 내에 완성하려는 급한 공사 일정이 화를 자초했다는 의혹이 높습니다. 전문가들이 보다 신중해야했지만 섣부른 자신감이 일을 그르쳤다는 비난도 비켜날 수 없습니다. 현재 박락요인을 찾고 복원 방법을 강구하고 있지만, 우리 것을 온전히 우리의 손으로 지켜낼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하며 올 것이 왔다는 탄식이 깊어집니다.

특히 물감이 호분과 석간주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일본의 수입품이라고 분노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현재 우리의 전통채색안료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화 전공자들이 채색을 하려면 일본이나 중국을 통해 수입된 화구를 이용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만들었던 우리의 국보를 복원하는데 어쩌다 우리의 기술력이 그 명맥을 이어오지 못하게 된 것인지 통탄할 일입니다.

사실 조선시대에도 상급의 채색 재료는 대부분 수입이었고 가격이 비싸서 채색의 용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실을 중심으로 보면 의복을 비롯하여 대부분 중국의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하였기에 이의 표현 재료 역시 중국을 통해 물품을 조달받고 그 형식을 준수하는 경향을 띱니다. 이는 곧 자체적인 색 재료의 개발보다는 중국을 통해 수입된 색 재료에 의존하는 경향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중화주의의 해체를 목격하면서 스스로가 창작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은 곧 창작을 위한 물적 토대의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채색 민화의 수요가 늘어나고 채색문화의 성행은 색 재료의 공급을 요구하게 됩니다. 조선후기의 기록들을 보면 이전의 시대보다 채색 재료의 공급이 나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입채색과 자급채색이 있었고, 특히 후대로 갈수록 자급채색의 가격이 낮아지는 것은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과 제조법이 점점 발달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토산안료가 나오는 산지가 기록되고 실제로 궁궐의 단청에 사용되었다는 물감들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전통채색물감을 개발하고 기법을 복원하는 것이 요원한 일은 아닙니다.

숭례문의 복원 방법을 두고 시름이 깊습니다. 아크릴 에멀전 합성수지와 화학안료로 우리의 얼굴을 떡칠할 수도 없고, 다시 일본산 물감으로 화장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가능한 한 우리의 전통 재료를 찾고 그 기술방법을 복원하여 정성을 다하는 마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아플 때 치료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상비약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현실, 그것이 오늘 우리 전통문화의 현주소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빛깔을 찾아야 합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4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정달호 (211.XXX.XXX.254)
우리 전통 안료 제조의 현실에 대한 깊이있는 관찰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채색화에 대한 관심, 나아가 안료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어서 언제부턴가
제조의 명맥이 끊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 스스로도 일본에서 여러 번 안료를 구해서 수요로 하는 사람에게 전달해
준 적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안타까운 일입니다.
문화정책상으로 우리 안료 제조의 명맥을 잇는 어떤 조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4, 5년전 애당초 숭례문 화재에 이르게 된 경위를 더 철저히 조사해서 종합적인 보고서를 만들고 이런 일이 절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텐데 복원 작업마저도 이렇게 되고 보니 당국을 믿어도 되나,
하는 걱정이 쉬 가시지 않습니다.

전문지식 뿐 아니라 용의주도한 행정력을 갖춘, 그래서 이젠 믿어도 되는
그런 문화재청장을 뽑아야 할 것으로 봅니다
답변달기
2013-11-25 14:41:27
0 0
이광복 (14.XXX.XXX.10)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답변달기
2013-11-08 13:01:04
0 0
libero (175.XXX.XXX.208)
덕분에 우리 문화재 관리의 안타까운 현실을 잘 알게 됐습니다.
힘써 일한 것에 보람을 느끼면 좋으련만 그 공을 더 탐하다 일을 그르치게 되는군요.
답변달기
2013-11-07 10:36:03
0 0
신아연 (112.XXX.XXX.157)
잘 읽었습니다. 전문가의 식견이라는 것이 이래서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현상 이면의 '불편한 진실들', 우리 사회 곳곳에 부끄러운 얼굴들이 숨어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답변달기
2013-11-07 05:29:10
0 0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