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재 시인과 정치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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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재 시인과 정치 재판

방석순

2013년 11월 28일 (목) 02:10:01

딱 지금과 같은 늦가을의 주말 친구들과 정릉 골짜기를 찾았습니다. 북한산 등산로 입구 탐방안내소에서 산행객들에게 여러 가지 읽을거리를 빌려 주고 있었습니다. 얄팍한 시집 한 권을 배낭 뒷주머니에 꽂아 넣었습니다.

찬바람을 피한 아늑한 반석을 찾아 도시락을 풀었습니다. 땀 흘리며 산에 오른 뒤의 밥맛은 꿀맛. 따사로운 햇볕 아래 배 불린 후 배낭을 등지고 누워 파란 하늘을 쳐다보니 세상 부러울 것 없습니다. 시집을 뒤적이다 발견한 시 한 편이 재미있어 몇 번이고 되풀이 친구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짧지만 여운이 긴 시 ‘너에게 묻는다’는 이후에도 여러 곳에서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겨울철 불우이웃돕기 행사인 ‘사랑의 연탄 나르기’에도 인용되고, 광화문 네거리 교보빌딩 큰 벽에도 내걸려 오가는 사람들의 가슴을 덥혀 주었습니다. 시가 주는 감동이 그런 것인가 봅니다. 짧은 시 한 구절이 백 마디 장광설보다 더 설득적입니다.

시는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언어입니다. 시는 정신의 체기를 뚫어주는 활명수와도 같습니다. 시 정신이 인간의 영혼을 맑게 해줍니다. 그러니 시인의 존재 이유는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꿈과 희망을 키워주는 데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탄재’로 유명해진 시인 안도현 씨가 재판을 받아 또 한 번 유명해졌습니다. 혹시 필화사건인가, 지레짐작하기 쉬운 안씨의 혐의는 어이없게도 선거법 위반입니다. 사연도 시인의 세계와는 너무 동떨어지게 정치성 험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 직전 ‘보물 안중근 의사의 유묵(遺墨)을 누가 훔쳐갔나?"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려 당시 박근혜 대선후보를 여러 차례 비방했다는 것입니다.

안씨는 "후보자 비방 등의 혐의에 대해 국민의 상식과 눈높이에 맞는 판단을 듣고 싶다"며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습니다. 공판 당일에는 가칭 '안도현 시인과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사람들의 모임'이 법정 앞에서 ‘힘내라, 안도현 시인’이라는 격려행사를 열었습니다. 문성근 전 민주당 대표, 진성준 민주당 의원, 양정철 노무현시민학교 교장, 주진우 시사인 기자 등이 모여 “안씨는 주옥같은 시로 국민의 마음을 위로하고 진실을 추구해왔다. 그가 정권의 탄압과 압박에 상처받으면 안 된다"며 바람을 잡았습니다. 일반인들의 인식도 아직 모호하고 순기능에 대한 믿음도 아리송한 시기 민주당 텃밭에서 신청한 국민참여재판의 얄팍한 노림수가 읽히는 대목입니다.

배심원 7명이 전원 무죄 평결을 내린 이 난감한 재판에서 재판부는 고심 끝에 “피고의 허위 사실 공표는 사실이지만 허위로 인식했다고 볼 수 없어 무죄, 박 후보를 낙선시킬 목적으로 비방한 사실은 유죄”라며 벌금 100만 원의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습니다. 안씨는 결국 정치 재판에서는 무죄, 사법 재판에서는 유죄인 묘한 선고를 받은 셈입니다.

18대 대선을 앞둔 지난해 10월 안씨는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대선 캠프에 참여해 10인 공동선대위원장으로 뽑혔습니다. 그보다 앞선 4월 총선에서는 민주당 공천위원으로 정치판에 발을 들이밀었습니다. 시인의 꿈과 함께 그는 정치적인 야망을 키워왔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소 시집으로만 대하던 시인에게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역할이지만 그래도 혹시 삭막한 우리 정치판에 시인이 참여한다면, 시적인 정치가 이뤄진다면. 막연하나마 그렇게 시인의 정치에 대한 기대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실 정치 속 시인의 모습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박 후보의 부모가 왜 총에 맞아 죽었나.” “공주가 여성을 대표하는 시절은 아니다.” 상대당 후보를 몰아세우는 그의 입에서는 예상치 못했던 독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계속된 막말 끝에 달려 나온 것이 이번 재판입니다.

확인 안 된 악성 루머를 확대 재생산, 유포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안씨는 재판 후에도 거침없이 독설을 뿜어냈습니다. “법이라는 거미줄에 걸린 한 마리 나비의 기분이 이럴까. 재판부는 재판을 한 게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곡예를 하면서 묘기를 부린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꼬았습니다.

재판 안팎 소식을 전해 들으며 재판부의 곡예보다 한때 시인이던 사람의 입이 지어내는 언어의 유희를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시인이라면 무엇보다 잘못된 일에 대한 솔직한 시인과 사과가 앞서야 하지 않을까. ‘시(詩)’를 ‘순수’로 읽어온 어리숙함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시인의 정치 놀음과 정치인의 시적 유희, 안도현 씨의 사례를 보면서 이런 미성숙 사회에선 어느 쪽도 양립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씨는 또 이번 재판을 받으며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에서는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답니다. 절필 선언에 앞서 스스로 고민이 없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쓰겠다 한들 지금처럼 진흙탕 속을 뒹굴고도 과연 순수한 마음의 맑은 시가 쓰일지 의문입니다. 정작 고민스러운 쪽은 독자들입니다. 그의 시를 계속해서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미 그의 시 정신은 박제된 시집으로 선반을 채우고 있을 따름입니다.

연탄재, 정말 함부로 차면 안 됩니다. 발목을 삐거나 그 밭에 뒹굴게 될지도 모르니까.

玄武 (115.XXX.XXX.45)

방 선생님 부탁이 있습니다. 다 좋은데요,
아래 글 ‘독자들’에서 저는 빼주세요. 저는 아니거든요.
제 생각까지 방 선생님 판단에 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개인의 생각을 오지랖도 넓게 ‘연탄재’ 시인의 독자들을 대표하고 계십니다.

(“..,정작 고민스러운 쪽은 독자들입니다. 그의 시를 계속해서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미 그의 시 정신은 박제된 시집으로 선반을 채우고 있을 따름입니다.”)

요즘 ‘정신을 훔쳐간 놈 잡아라.’ 소리치면 훔쳐간 흉악한 도적놈은
내버려두고, ‘도둑놈 잡아라.’ 소리쳤다고, 시끄럽게 했다고 타박들 이십니다.
정신을 훔친 도적놈하고 한통속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보리밭에 들어갔다가 명주속곳 찢겨 나온 것도 모두가 자기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