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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시골에서
고영회 2014년 02월 05일 (수) 01:10:33
이번 설 잘 쇠셨습니까? 저도 시골에 다녀왔습니다. 조상께 차례를 지내고 묘소에 절도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도 조카에게서 세배를 받지만 그들이 사회활동을 하니 세뱃돈을 줄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번에 차례상을 좀 자세히 봤습니다. 차례상에 밥 국 나물에 이어 과일을 보니 한라봉 바나나 서양참외(멜론)가 한 자리 잡았더군요. 한라봉과 멜론은 국내에서 농사지은 것일 테지만, 바나나는 수입한 것일 텐데 제사상에서 보니 느낌이 색다릅니다. 수입 과일이 제사상에 오르는 것도 우리 시대의 한 모습이겠죠.

제사상 뒤에는 병풍을 세웠습니다. 병풍에는 한자인 듯이 보이는 글자를 그렸는데, 정자체가 아니라 읽을 수 있는 글자가 거의 없습니다. 정자로 썼어도 뜻을 이해하지 못했겠죠. 병풍에 분명히 글이 적혔는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고, 그렇다고 그림은 아닌데, 이런 병풍을 왜 세우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우아한 그림이 그려진 게 나을 듯합니다.

   
설날 제사에는 지방(紙榜)을 붙이지 않기에 다른 제사 때 얘기입니다. 아버지 제사를 모실 때 지방에는 한자로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 적었습니다. 이것은 벼슬을 살지 않은 보통 사람일 때 이렇게 쓴다고 들었습니다만, 이것 참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제사를 주관하는 형님께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다음부터는 쉽게 알 수 있는 우리말로 바꾸는 게 어떻겠습니까?”하고 제안했더니, “네가 준비해서 보내면 그걸 붙이마.” 했습니다. 앞으로 부모님 제사에는 “아버님께 올립니다. 어머님께 올립니다.” 이렇게 쓰자고 제안하려 합니다. 지금까지 써온 지방은 지금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제 아래 세대는 더욱더 모를 테니 알 수 있게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제사를 모시고 묘소에 갔습니다. 예전에 있던 봉분을 없애고 작은 표지석을 놓았습니다. 표지석을 보니 한자로 '長興高公諱春錫/配晉陽姜氏斗順/之墓'를 크게 적고 아래 칸에는 좀 작은 글자로 '子 子婦 孫 女 婿'를 앞세우고 그 뒤 한글 이름을 팠습니다. 표지석에 한자와 한글이 뒤섞여 있습니다. 저도 겨우 익혀 알 뿐인데, 표지석에 새긴 저 글자를 아는 후손이 얼마나 있을지 걱정입니다. 이제는 표지석에 새기는 글자를 한글로 파고 한자 이름은 괄호 안에 넣으면 좋겠습니다. '아들 며느리 손자 딸 사위' 이렇게 새기면 누구나 압니다. 표지석은 누구를 모신 곳인지 알리려고 세운 것인데, 그 표지석을 보고 누구를 모셨는지 알 수 없다면 저 표지석은 제구실을 못합니다. 집안 흉을 본 셈이라 속이 불편합니다만, 다음에 다시 만들 때에는 알기 쉽게 만들면 좋겠다는 뜻으로 씁니다. 표지석도 못 읽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한자 공부시켜야 한다는 말을 안 듣길 기대합니다.

시간이 좀 있기에 가까운 곳에 있는 절(청곡사)에 들렀습니다. 부처께 소원을 빌 겸해서요. 이 절에서 국보급 보물(국보 제302호 영산회괘불탱)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절 기둥에는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글이겠죠. 기둥에 적힌 글은 한자를 휘갈겨 쓴 것이라 상당히 한자 실력이 없으면 읽기도 어렵고 나아가 뜻까지 알기 어렵습니다. 중생이 부처의 가르침을 얻으러 절에 가는데, 가르침을 저렇게 어렵게 적어두면 어떻게 가르침을 얻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옛날에 지은 절은 그 시대여서 그랬다 하더라도, 요즘에 지은 절 기둥과 현판에도 한자로 적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최근 서울 근교에 지은 어느 절에는 모두 한글로 적은 것을 봤습니다. 종교가 보통사람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라면 보통 사람이 알 수 있게 가르쳐야 맞습니다. 일반인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누구를 위한 종교일까요?

한자 어렵게 써놓고, 어려운 영어 몇 글자 안다고 젠체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말과 글자는 뜻을 전하는 수단입니다. 뜻을 쉽게 분명하게 전하면 그게 좋은 말과 글입니다. 그게 우리말 우리글입니다. 조금씩 달라진 모습을 그리며 다음 설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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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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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8가지) (119.XXX.XXX.227)
=김자현 2014-02-05 14:41:30
일리도있고 뜻또한 이해하겠으나 다소 일방적 주관같아서 음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겠구나 싶다.
=최석근 2014-02-05 12:52:16
그래서 저는 아예 지방을 한글로 바꾸었습니다. "아버지000 신위"
=이상두 2014-02-05 10:52:07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꺼다요 입니다.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마침 저도 부모님 표지석을 세울려고 계획하는 중이라 더더욱 마음에 글들이 와 닿습니다. 이번 명절때 저희집도 지방, 축문에 대해서 꼭 같은 논의를 했었습니다.
이제 어른들이 다 돌아가셔서 장남인 큰형님께서 제사를 모시는터라 아무래도 우리말, 우리글 사용에 대해 받아들이기가 수월해진것 같아요.
예전에 정부에서 공표(?)했던 가정의례준칙이라는게 생각났습니다.
그때는 물론 허례허식을 줄이고, 간소화하자는 취지가 컷지만, 거기에는 지방, 축문 쓰는 법 등이 나옵니다. 이제는 그것을 한글화하여 후손들이 이해하고 알아듣기 쉽게 번역(?)해서 재배포를 하면 좋지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고영옥 2014-02-05 09:41:05
칼럼을 읽으면서 인사못한 설인사를 드린다. 새해에도 좋은 글 기다리면서 내 내 건승하시도록........... 차밭에서 형이
= 이승우 2014-02-05 09:25:09
한자가 어렵고 불편하지만, 사실 우리 한글의 조어는 대부분 한자로 하기 때문에 한자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문으로 된 글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이 담겨있습니다. 중국의 문자이지만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사용한 것이기에 국어로 보는겁니다. 불편하다고 없애야 한다는 것은 전통, 양식, 문화 등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요즘 문제가 되는 풍조는 조금 불편하다고 무조건 없애고 보는 '가벼움' 아닐까요. 건축이 공학이긴 하지만 미학의 측면도 있는 것처럼, 모든 사물에는 이면이 있습니다.
=한승국 2014-02-05 09:07:47
그렇지요. 차례도 제사도 종교도 서로 소통하가고 하는 건데요. ^^*
=이대로 2014-02-05 08:04:28
참 좋은 글이고 옳은 말씀입니다. 고맙습니다.
= 박종철 2014-02-05 07:30:46
고영회 회장님 잘 읽었습니다. 제친구 초대작가가 있는데, 그친구에게 전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어이 자네, 시대가 변하고 있으니 이제 한문서예는 종지부를 찍고 한글 세체로 바꾸게나...이렇게 조언하는 자료로 전달하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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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3 11:41:56
0 0
임종건 (121.XXX.XXX.80)
전기불이 환하게 들어 오는 시대임에도, 대낮에 모시는 차례임에도 촛불을 밝히는 풍습을 나도 따르고 있어요. 등잔불 시절에 촛불을 밝히면 좀더 밝았겠지요. 지금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풍습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시대에 안 맞는다고 다 바꾸면 풍습자체가 필요없어지겠죠. 우리는 부모한테 배운 거니까 따라하지만 지금 아이들이 부모세대처럼 따라할까요? 그렇지 않을 것 같지 않나요? 많이 변형되던지 없어질 것 같잖아요. 왕가 또는 종가집에서나 유물저럼 남게 될거라고 생각해요. 종가집 제사도 子時에 모시던 제사를 초저녁에 모신다고 하던데 전통을 정통적으로 지켜가는 제사 풍습이 백년 후면 많이 바뀌겠죠. 그래도 한 집이라도 옛것대로 지키는 집이 남아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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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5 21:44:37
0 1
玄武 (115.XXX.XXX.68)
'한자, 사람한테 참 좋은데, 사람에게 정말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직접 말하기도 애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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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5 20:23:08
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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