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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간 지갑
김창식 2015년 02월 02일 (월) 00:36:13
지난달 당황스런 일을 겪었습니다. 동네 지하 슈퍼에서 물건을 사려는데 호주머니가 허전한 것이에요. 여기저기 내 몸 내가 만지며 희롱해도 익숙한 촉감은 와 닿지 않더군요. 동선을 되짚었지만 무표정한 여직원은 고개를 젓고, 감과 귤, 건어물, 수증기를 뒤집어쓴 냉동식품 등 직원을 닮은 상품들 역시 묵묵부답. 사무직원에게 연락처를 주고 물러날 수밖에요. 술 취해 정신 줄 놓고 다니면서도 지갑은 꼭 챙겼는데 하는 비감한 마음이 들었어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때가 어느 땐데. 술 마시는 게 무슨 자랑이람?

참, 슈퍼에 들르기 전 카드로 ‘단기대출서비스’를 받았더랬지. 부리나케 자동화기기센터를 찾았지만 확인되지 않는 정보가 담긴 ‘찌라시’ 수준의 삐라 몇 장만 나뒹굴더군요. 아, 호출 전화로 연락해 그 흔한 CCTV로 확인하면 되겠구나. 그럴싸 그러한지 일이 되느라고(안 되느라고) 부스 옆면에 달린 호출 폰은 귀가 먹었어요. 옆 박스를 기웃거려 순발력 있게 낚아챈 전화로 은행 상담직원과 어렵사리 통화를 했습니다. 지갑을 분실했을 무렵의 시간대를 이야기했더니 그보다 신고자 본인의 인상착의를 말하라고 해요.

160cm를 가볍게 넘는 작은 키에, 안경을 꼈고, 검정 추리닝 바지에, 목까지 올라오는 검정색 점퍼를 입었으며, 방한모자를 눌러썼고 아, 마스크는 착용 안 했어요. 어쩌구저쩌구…. 페르소나가 아닌 민낯의 나를 설명하는데 자괴감이 들고 낯설기만 했답니다. ATM 박스를 물러나는 기분이 언짢기 짝이 없었어요. 국 쏟고, 손 데고, 그릇 깨뜨리고, 동네방네 금실 나쁘다고 소문나고. 유‧관‧장(劉‧關‧張) 3형제와 단신으로 맞장 뜨다 세궁역진(勢窮力盡)한 여포도 아니고, 같잖은 애들 싸움에 우습게(우습지도 않게) 휘말렸다가 꽁무니 빼는 꼬락서니라니. 어쨌거나 상담여직원의 목소리는 따뜻했고 응대는 친절했죠.

“고객님 당황하셨죠? 많이 걱정되시겠습니다. 잠시만요, 그런데 이를 어쩌죠? 근무시간을 초과했네요. 게다가 주말이 끼어서요. 다음주 월요일 아침 이른 시간에 담당 직원을 통해 꼭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객님 행복한 주말 되세요.”

득달같이 집에 달려와서 우왕좌왕 허둥지둥, 설레설레 좌충우돌, 저 남자 거동 보소! 카드명세서니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는데 촉이 좋은 편도 아닌 아내가 별것도 아니라는 듯 분실 신고부터 하라고 한마디 툭 던져요. 그러고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아, 현명한 아내여! 불이 나면 우선 불부터 잡아야 하는 법. 화재원인 분석이나 재발 방지대책은 나중에 수립. 콜 센터 직원 역시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얼뜬 회원을 힐링해 주었어요. 급한 불을 꺼 한결 마음이 놓이는 틈새로 새로운 불안이 고개를 쳐드는데, 그 판국에도 뉴 저먼 시네마(New German Cinema)의 기수 라이너 파스빈더(Rainer Fassbinder)의 영화가 생각나더군요. 맥락이야 사뭇 다르지만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지갑에 크레딧 카드 말고도 다른 내용물도 있었는데. 보유 현금이야 도시 빈민층 수준이니 크게 신경 쓸 거 없다 하더라도 주민등록증과 자동차면허증은 골치 아프구만. 아, 면허증은 철 지나고도 게을러서 아직 갱신 안 했으니 있으나 마나 한 것이고(크게 다행?), 그렇더라도 주민등록증은 문제가 되네. 동회가 몇 시까지더라? 여보, 뭐해? 어서 114에 전화해서 동회 전화번호 안 알아보고. 뭐, 본인이 하라고? 덧붙여 요샌 동회라 안 부르고 주민센터라 부른다고 주의를 주네요. 뭐지? 개그콘서트인가? ‘쉰 밀회’? 알았어요. 알았다니까.

다음은 주민센터 직원과의 대화를 간추린 것입니다. 여보세요, 주민센터죠? 주민인데 주민증을 분실해서요. 전화로는 안 되니 신분증 지참 신고서를 작성해야 한다고요? 그것도 전산 시스템이 먹히지 않으니 6시까지는 와야 된다 말이죠? 바로 그 신분증을 잊어버렸다니까 그러시네. 아무거나 가지고 오라고요? 그래도 아무거나는 아니잖아요? 아, 신분을 증명할만한 증서 아무거나요. 건강보험증이면 되나요? 그보다 지금 5시 50분인데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그러니까 빨리 출발하라고요? 예, 알았습니다. 나는 현관문을 문을 밀치며 '배달의 기수'처럼 외쳤어요. 지금 다 와 갑니다. 곧 도착해요.(뒷 이야기는 다음 칼럼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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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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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 (125.XXX.XXX.139)
ㅎㅎㅎ...
마치 저를 대한 듯 친밀감을 느낍니다~ ㅋㅋ
저도 워낙 뭘 잘 흘리고 다니니까요
그래도 지갑은 손전화 보다는 덜 당황스럽지요?
손 전화 속에는 세상이 다 들어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속히 찾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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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3 19:03:24
0 0
김창식 (110.XXX.XXX.56)
그렇습니다, 인내천 선생님. 손전화를 잃어버리면 거의 재앙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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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8 18:55:28
0 0
김윤옥 (39.XXX.XXX.180)
얌체 기질이 조금 있는 칠순의 언니가
남의 비닐 봉투 하나를 슬쩍해서 자신의 책 한 권을 담아서 버스를 탄 뒤
핸드백은 그냥 두고 비닐봉투만 들고 내렸습니다.
막 출발하는 버스를 보면서 아차! 했지요.
곧 뒤따르는 버스를 타고 다음 정류장에 내려서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서 앞차를 잡았습니다.
평생에 그날 처럼 빠를게 달린적이 없답니다.
그리고 다시는 얌체짓을 하지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늦은 나이지만 반성한다는 것은 더 나아진다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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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3 23:19:48
1 0
김창식 (110.XXX.XXX.56)
가출한 지갑은 반성해야 합니다, 김윤옥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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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6 13:02:24
0 0
하재준 (58.XXX.XXX.104)
잘 읽고 갑니다.
'주민센터 직원과의 대화' '현금이야 빈민층 수준' '게을로서 아직 갱신하지 못한 운전면허증이니 있으나 마나' 등의 익살섞힌 대화는 퍽 재미가 있습니다. 글은 재미가 있어야 읽을 맛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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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3 07:55:29
0 0
김창식 (110.XXX.XXX.56)
하재준 선생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실제 있었던 일(100%)을 재구성한 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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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3 15:22:46
0 0
이내야 (222.XXX.XXX.89)
쉰밀회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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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3 06:16:15
0 0
김창식 (110.XXX.XXX.56)
이내야 선생님, '쉰밀회'는 TV 드라마 '밀회'(김희애, 유아인)를 빗댄 개그 콘서트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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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3 15:21:09
0 0
꼰남 (112.XXX.XXX.25)
ㅎㅎㅎ
저도 함께 현관문을 밀치고 따라 나섭니다.
다음 칼럼 기대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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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2 09:37:01
0 0
김창식 (110.XXX.XXX.56)
알겠습니다, 꼰남님. 그럼 함께 달려나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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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2 09:53:01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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