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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빌려주면 바보인가?
이동식 2007년 10월 27일 (토) 07:44:32
 예전에는 책이 무척 귀했습니다. 그래서 책을 보기 위해 책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빌려주는 측에서 보면 책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빌려준 후 곧바로 후회하고, 안 돌아오면 다시 후회하며 빌려준 자신을 바보라고 자책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말에도 책을 빌려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빌린 책을 돌려주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라는 ‘이치(二痴)’란 말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당나라 단성식(段成式)이 쓴 《유양잡조酉陽雜俎》라는 책에 나오는 것인데, 송나라로 내려가면 ‘사치(四痴)’로 늘어납니다. 송나라 방작(方勺)의 《박택편泊宅編》에 나오는 것인데, “借一痴,惜之二痴,索三痴,還四痴”, 곧 “책을 빌려주는 것도 어리석고 그 책을 아까워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며, 책을 찾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고 책을 돌려주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설은 잘못 전해질 수 있는 모양입니다.

송나라 주휘(周輝)가 쓴 《청파잡지淸波雜志》라는 책에는 바보라는 뜻의 치(痴)는 원래 글자가 웃는다는 뜻의 ‘치(嗤)’, 또는 술 단지를 뜻하는 ‘치(希+瓦)’여서 원래 뜻은 “책을 빌려주며 웃고 돌려받으며 웃는다”, 혹은 “빌릴 때에 술 한 단지를 사고 돌려줄 때에도 한 단지를 산다”는 뜻이라고 하네요. 책을 빌려주고 돌려주는 일이 그만큼 좋은 일이고, 그래서 서로 술로 기쁨을 나눈다는 뜻이죠. 그것이 발음이 같은 ‘치(痴)’로 전이되면서 책을 빌려주거나 돌려주는 사람 모두 바보라는 뜻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책을 빌릴 때에는 술을 사는 관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북경에 가서 많은 책을 사 온 김이수에게 책을 빌리기 위해서 시를 지었는데,

한 병 술 마련하여 그대 집에 보내는 건 一 解辨君家送
좋은 책 있음을 알고 자주 빌리려는 걸세 知有奇書得得來

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송나라의 여희철(呂希哲)은

나에게는 책 빌려오고 술 사는 일뿐 除却借書沽酒外
공사간에 시끄러운 일이라곤 없네 更無一事擾公私

라고 하였다고 허균이 그의 책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옛사람들이 얼마나 책을 아꼈는가 하면 당나라의 두섬(杜暹)이란 사람이 자기 집에 있는 책 끝에다 스스로 쓰기를 "녹봉을 받아서 책을 사다가 손수 교정하여 두니, 자손이 읽으면 성인의 도리를 알 것이며, 책을 팔거나 남을 빌려주면 불효가 될 것이다" 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저런 사연 때문에 책이란 빌려주지 않는 것이란 인식이 우리 사회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바꾸라고 옛 사람은 말하고 있습니다. 당경(唐庚)이란 사람은 아끼던 다기(茶器)를 잃어버리고는 속을 끓이다가 하인들에게 잃어버린 것을 “찾지 말아라. 그것을 훔쳐간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 다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터이니까 얼마나 좋아하며 이용할 것이니 그 다기는 보물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는데, 책이란 것도 결국은 그것을 가지고 가서 돌려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주 귀중한 것이 될 것인 만큼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는다고 그리 애통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실제로는 수 만 권의 책을 모았다고 해도, 자신만 욕심을 내고 갖고 있다가 사후에 흩어지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금화(金華)의 우참정(虞參政) 집에는 수만 권의 책을 장서(藏書)하였는데 누각(樓閣) 한 채를 연못 중앙에 지어 책을 쌓아 두고, 조그만 나무로 다리를 놓고 밤에는 그 다리를 걷어 치웠다. 그리고 그 문에 써 붙이기를 '이 누각에는 손님도 받아들이지 않고, 서책도 남을 빌려주지 않는다.' 하였으나, 그가 죽은지 얼마 안 되어 그 자손이 이 책을 지키지 못하였다. 호원서(胡元瑞 원서는 호응린(胡應麟)의 자)가 비싼 값으로 그 책을 사겠다고 속여 우씨 집에 있는 책을 모두 실어 오게 하자 두어 척의 큰 배에다 실어 왔는데, 돈이 없어서 못 사겠다고 핑계하며 다시 실어가라고 하니 우씨의 아들은 도리어 친분 있는 사람의 소개를 통하여 이를 다시 헐값으로 호씨(胡氏)에게 팔아 넘겼다. 이에 호씨는 그 많은 책을 가지고 국내에서 내노라 하고 뽐내었으나, 끝내 그 책을 책답게 간수하지 못하고 죽었다. 나는 일찍이 이 일로 호씨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사람을 속여서 싼 값으로 취득하는 것이 어찌 사대부가 할 일이겠는가?”

라고 책을 지나치게 아끼다가 허망해진 사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광평(廣平) 신함광(申涵光) 같은 이는 평소에 말하기를 “좋은 서책이 있으면 가난한 친구로서 배우려 하는 뜻 있는 사람에게 빌려준다” 라고 하였다며

“대저 책은 천하 고금의 제일 가는 보배이기에 쌓아 둔 지 오래되면 반드시 흩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옛적부터 책에 액운이 있어 화재를 당하거나 침수되는 일이 있기는 하였으나 나는 화재나 침수만이 액운이 아니라고 본다.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있으니 깊이 깊이 감추어 두며 모으기만 하고 내놓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몇 해가 지나도록 읽지도 않는 까닭에 썩거나 해지거나 좀먹거나 쥐가 쏠기 때문에 좋은 물건을 단번에 못쓰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그런 사람은 무슨 심정인지 모르겠다.”

고 하면서 좋은 책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빌려주어 널리 읽히도록 하는 것이 군자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가을. 특히 10월이 되면 책을 읽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이나 사회적 압박이 매우 높습니다. 누가 꼭 강요해서가 아니라 10월이 독서의 계절이라고 어려서부터 배워왔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책을 사 읽지도 않고 인터넷의 요약문으로 대신하니 책이 필요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짜로 주는 책도 받지 않으려는 것이 요즈음의 세태가 아니던가요?

요즈음에는 옛 사람처럼 굳이 책을 빌리려고 애 쓸 바보가 없습니다. 도서관을 가면 되는 것이죠.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이 필요한 책은, 원한다면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책이 많아졌고 또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습니다. 이제는 책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책을 읽으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도서관은 입사시험 공부방으로 변했고, 책이 팔리지 않으니까 점점 책을 찍어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들이 보다 많은 사고를 하고 그것을 기록해 남에게 전해주는 문명의 도구, 인생의 동반자로서의 책이 점점 다양성을 잃고 그 존재가치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고, 그만큼 우리들의 생활도 외곬이고 무미건조해지고 있는 것이 요즈음입니다.

앞으로 책을 빌리는 사람, 빌려주는 사람을 바보라고 하지 맙시다! 아니 (빌리던 사던 간에) 제발 책을 더 많이 봐달라고 부탁합시다!


이동식 : 현재 KBS 부산방송 총국장.
30년간 KBS 방송기자로 일했다. 베이징특파원 과학부장 국제부장을 거쳐 런던지국장 보도제작국장 등을 역임했다.
1980년대 백남준 윤이상 등을 소재로 한 인물 다큐와 ‘실크로드를 달린다’ 등 기행 다큐를 다수 제작했다.
저서로 ‘천안문을 열고 보니’ (1996) ‘청명한 숨쉬기’(200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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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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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옥 (211.XXX.XXX.162)
이국장님! 평강지기 원입니다.저도 책에 욕심이 많아 잔뜩 사 놓고는 읽을 여유를 못 찾아 이를 어찌할꼬 했는데 결론은 나눔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앞으로 평강 동산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고 싶네요.자연 속에서 책을 통해 깊어지고 자연을 통해 넓혀 지는 환경을 꿈궈 봅니다.이런 건강한 사이트 소개해 주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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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8 21: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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