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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영(方又榮)
임종건 2016년 05월 17일 (화) 00:03:40
   
  고 방우영 조선일보 고문의 자서전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의 표지.  

지난 8일 조선일보 방우영 고문이 88세로 타계했습니다. 고인과는 면식이 없는 사이지만 언론인들의 대화 속에 심심찮게 회자됐던 이름이었으므로 저에게도 들은 얘기는 제법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8년 전 그의 팔순을 기념하여 출간된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는 제목의 자서전을 읽고 나서 저는 고인을 조금 새롭게 보게 됐습니다. 저는 자서전을 잘 읽지 않는 편인데 읽다보면 솔직함보다 자기자랑처럼 여겨지는 대목이 많아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자서전에도 그렇게 여겨질 듯한 대목이 없지 않았고, 언론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청와대 스캔들’에 대한 기술도 없었지만 단숨에 읽었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내용이었습니다. 읽는 내내 제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는 왜 아침이 두려웠을까?’였습니다.
 
책의 마지막 부분 ‘나의 경쟁자, 나의 스승’ 편에서 ‘두려운 상대이자 본받고 싶었던 선배 장기영’ ‘아침마다 조선일보가 아닌 한국일보를 먼저 읽어’라는 소제목의 글에 이르러서야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이 대목에서 고인은 1977년 4월 11일 새벽 한국일보 창업자 백상 장기영의 별세 소식을 자택에서 비상전화로 연락받고 난 뒤 심경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백상 장기영, 그는 내가 신문사를 경영하면서 가장 두려운 존재였고, 본받을 선배였으며, 실질적인 스승이었고, 힘겹게 겨루어야 할 상대였다. 나는 신문사 경영에 뛰어든 순간부터 아침에 눈을 뜨면 조선일보보다 한국일보를 먼저 손에 들었다. 한국일보가 특종하면 하루 종일 우울했고, 우리 신문이 앞서면 기분 좋게 아침밥을 먹었다. 그런 세월이 10년 이상 갔다.’
 
조선일보 사장으로서 자신의 약점을 자서전의 제목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런 세월 10년’은 조간은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석간은 동아일보 중앙일보가 경쟁하던 조석간 체제의 시대였습니다. 고인은 한국일보와 한국일보의 창업자 장기영을 두려워했다는 얘기였습니다.
 
오늘날 부동의 일등 신문으로 평가받는 조선일보인 만큼 자랑하고 싶은 얘기도 많을 터이지만 ‘4등 신문’으로 경쟁지 보기가 두려웠던 시절을 기억하는 그의 자세에서 대인의 풍모가 느껴졌습니다. 제가 그 책을 단숨에 읽었던 것도 글 속에 배어 있는 그런 솔직함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에게 장기영은 두렵고 힘겨운 상대만이 아니라 ‘본받을 선배’였고, ‘실질적인 스승’이었습니다. 그의 장기영에 대한 이같은 인상은 장기영이 한국일보를 창간하기에 앞서 1952년부터 1954년까지 2년여 동안 조선일보 사장을 지내던 때 형성됐을 것입니다.
 
장기영 사장 시절 조선일보 기자(교열부 소속)가 된 방우영에게 그 2년은 장기영의 경영방법을 곁에서 보고 익히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입니다. 방우영이 뒷날 조선일보 사장이 된 뒤 발휘한 경영수완은 장기영이 한국일보 사장으로 발휘한 수완과 여러모로 닮은꼴이었습니다.    
 
자서전에서 고인은 장기영 체제로 신문사 경영은 안정을 찾아갔지만 2년 동안 빚이 무려 2억 원에 이르게 돼 그대로 두었다가는 신문사 소유권이 넘어갈 판이어서 장기영을 내보냈다고 썼습니다. 이 부분은 2010년에 발간된 ‘조선일보 90년사’에서도 좀 더 자세히 되풀이 기술됐습니다.
 
한국일보 사우회는 장기영 사장체제에서 조선일보 사세가 발행부수는 350%, 지대수입은 640%가 각각 신장했다고 기록하면서 다른 한편에선 빚만 늘린 사람으로 폄하한 것은 부당한 처사임을 지적, 시정을 촉구하는 항의서를 조선일보에 보냈습니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배포되지 않은 책에선 그 대목을 수정했다며 수정본을  한국일보 측에 보내왔습니다. 당시 방 고문이 이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면 분명 ‘잘한 일’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방우영 자서전에서 장기영 부음 대목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창밖에는 마악 물이 오른 연초록 버들가지들이 눈부셨다. 눈을 감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장기영을 두려워하면서 열심히 그를 배웠던 방우영에 의해 조선일보는 일등 신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장기영의 신문, 그리고 제가 36년간 몸담았던 한국일보는 이제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39년의 시차를 두고 이 초록의 계절에 이승을 뜬 한국 언론의 두 거목이 저승에서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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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영 (210.XXX.XXX.253)
감사합니다.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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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9 16:49:55
0 0
임종건 (222.XXX.XXX.92)
흥미가 있었다니 저도 감사합니다.
솔직함은 미덕이자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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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9 22:24:00
0 0
최석권 (58.XXX.XXX.64)
이제사 한국일보와 조선일보가 왜 싸우게 되었는지 알겠네요.
사장들 끼리 싸우니 말단 신문배달 학생도 싸우게 되었나 봅니다.
제가 70년대 중반 새벽에 한국일보 신문 배달을 했는데
제가 먼저 배달한 한국일보 신문을 누군가 빼내간적이 여러번 있었어요.
지국 배급소에서 총무가 그건 조선일보 배달원 짓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갓 인쇄되어 나온 신문 냄새가 그렇게 좋았는데...
지금은 그런 신문 냄새가 하나도 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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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8 23:31:49
0 0
임종건 (222.XXX.XXX.92)
제가 만든 한국일보는 아니었는지 몰라도 한국일보를 배달하셨다니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갓 인쇄된 신문냄새를 기억하시다니 신문을 많이 사랑하셨나봅니다.
신문사들이 그 때 벌써 그런 야비한 짓들을 했었군요. 뒷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사이에선 그 문제로 살인사건까지 났었죠. 방우영 사장이야 그런짓은 안 시켰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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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9 22:30:56
0 0
최석권 (58.XXX.XXX.64)
감사합니다.
그런 인연으로 한국일보를 30년 가까이 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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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0 22: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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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남 (112.XXX.XXX.25)
꼭 그래서 그랬을 것만은 아니면서도 그랬으리라 자연스레 동의하게 되는 것은 그 시대를 산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의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내 청소년 시절에 절감한 구체적인 사연들이 있어서 댓글 함 달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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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8 10: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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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건 (222.XXX.XXX.92)
제 글로 옛날을 회상하셨다니 저도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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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9 22: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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