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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향욱을 위한 변명
임종건 2016년 07월 20일 (수) 01:08:39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문제된 발언에는 변명의 여지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딱 하나 분명한 변명거리는 문제의 ‘개 돼지’ 발언과 ‘1% 대 99%’ 발언이 그의 창작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역사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등 온갖 분야의 학문적 용어인 '신분제'는 더 말할 게 없습니다.
 
나씨의 대화록을 보면 개 돼지 발언은 영화 ‘내부자들'의 대사를 동석한 기자의 도움을 받아 기억해 내 입에 올린 것으로 돼 있습니다. ‘1% 대 99%’는 2008년 금융 위기 후 세계를 휩쓸었던 빈자들의 반란인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the Wall Street)’ 캠페인에서 등장한 수치입니다.
 
‘개 돼지’ 대사는 영화 ‘부러진 화살’의 대사 ‘이게 재판이냐? 개판이지’에 비하면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1% 대 99%’도 ‘월가 점령’ 캠페인의 구호가 됐을 때는 빈부차와 부의 불공정 배분 현실을 다소 과장한 수치로 이해되었을 뿐입니다.
 
나씨는 자신을 1%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도 했습니다. 자신도 아직은 99%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1%의 선두주자로 낙인되었으니 그로선 억울하다면 억울하겠습니다.
 
문제된 발언들의 저작권은 이제 나씨의 차지가 될 판입니다. 다중적 의미로 해석돼야 할 그 발언 속의 용어들이 매우 나쁜 의미로만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된 것도 그에게는 씁쓸하겠습니다.    
 
'1% 대 99%'에 훨씬 앞선 19세기말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파레토는 ’20 대 80 법칙‘으로 불리는 ’파레토의 법칙‘을 알아냈지요. 전체 결과의 80%가 전체 원인의 20%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일컫지요.
 
이 법칙은 경영학에서 응용돼 20%의 고객이 매출의 80%를 차지한다거나, 구성원의 20%가 80%를 먹여 살린다거나, 나아가 한 국가에서 인구의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한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되곤 합니다.
 
19세기 말의 수치이니 21세기에 그 수치가 바뀌었겠죠. 20이 1이 되고, 80이 99가 됐다면 1은 엄청 좋아졌을지 몰라도 99에겐 엄청 나빠진 것이죠. 제로섬이 아니라 쌍방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자원의 배분이 ‘파레토 최적(Pareto Optimal)'인데, 1대 99라면 최악의 배분인 셈이죠.
 
그러나 1%만 최적의 상태고 99%가 불만뿐인 사회는 사실 존재할 수 없습니다. 혁명이나 쿠데타가 났겠지요.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삶은 어렵더라도 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갖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1 대 99의 사회인지, 대다수의 사람이 불만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사는 사회인지는 사람에 따라 판단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불평등이 심화하고, 희망을 잃고 불만 속에 사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국민들로 하여금 그런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입니다. 경제발전은 국민들이 희망을 이루는 기초적인 발판이지만 경제는 흐름이기 때문에 오름이 있으면 내림도 있습니다.
 
지금 같은 경제의 침체기에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나누고 절제하고 인내하고 배려하는 정신은 교육으로 함양되는 것입니다. 그런 역할을 해야 할 교육행정의 책임자가 사회의 불공정을 당연시하고, 국민의 99%를 '개 돼지' 취금했으니 비뚤어져도 많이 비뚤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 안에 ‘1% 그룹’ 또는 ‘0.1% 그룹’을 자처하며 비뚤어진 사고와 행동을 일삼는 부류의 계층이 엄존한다는 사실입니다.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롯데가 비리, 진경준 검사장 비리를 보면서 희망을 잃는 사람은 또 얼마나 늘었을까요.
 
국가는 그들이 국민정서에 미치는 나쁜 영향을 엄정한 법의 집행으로 차단해야 합니다. 나씨의 파동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자계(自戒)의 기회가 된다면 19일 중앙징계위 심의에서 파면 의결된 그에게도 작으나마 자위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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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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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현 (220.XXX.XXX.243)
어떤 경우로도 나향욱은 용서 될 수 없습니다 .. 자기는 1%이고
나머지를 99%로 보는 시각도 그렇고 개 돼지로 표현하는 그의
사상도 이것은 건강한 국민의식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권력자가 된다면 아마도 히틀러 같은 인간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이 되는군요 참으로 황당하고 어이가 없습니다
이 시대 이런 자가 존재 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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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9 09:16:32
0 0
이주영 (14.XXX.XXX.126)
맞습니다.
1%가 문제가 아니라 1%에 해당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하는 짓이 문제지요. 그런 사회의식을 용인하거나 부추기는 교육도 문제고요. 교육이 그런 사회를 견제하고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하는데, 요즘 교육이 점점 더 1% 중심으로 가기 때문에 국민 분노를 산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이면서 헌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발언을 했다는 것도 문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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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1 09:41:53
0 0
청유 (220.XXX.XXX.21)
출세했다고, 돈 있다고, 사회상류층이라고
교양 없이 사는 천박한 것들이 너무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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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0 19:42:30
0 0
ehlsehf (113.XXX.XXX.197)
1%와 99%의 담론은 양자가운데 누가 옳으냐의 문제에 그치면 안되고, 이렇게 양극화를 강요하는 시스템에 대한 심각한 검토를 요구합니다.
(1) 레이건, 대처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정책이후, 생산성향상과 가계소득의 병행상승이 꺠어지고, 가계소득정체가 일어나고 자본이 부를 독점하기 시작하고, 부의 편중화가 극심해졌다고 최근의 리포트가 있었고,
(2) 피케티가 지적했듯이 18세기말에 귀족의 토지자본독점이 극에 이르렀을때 <혁명>으로 부의 독점이 해소되었고, 산업혁명과 함께 발달한 독점자본가의 부의 독점으로 부의 편중이 극에 달했을 때, <공황>과 <전쟁>으로 부의 편중화가 해소되었다가, 20세기 말의 세계화/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은 다시 금융자본에 의한 극심한 부의 편중을 낳고 있습니다.
(3) 월가의 99% 시위를 불만에 찬 대중의 증오활동이라고만 보면 이것이야말로 안이하고 어리석은 시각일 것입니다.
(4) 나향욱은 개발독재시대의 생산품입니다.
지성인 자유칼럼니스트들께서는 사회적 역사적 책임과 함께 뜨거운가슴과 차가운지성으로 드라이한 글을 써주시기 희망합니다.
Dry pen with frozen heart가 되지 않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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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0 10:25:04
2 0
자작나무 (221.XXX.XXX.190)
사태의 본질이 <독창적 언어구사>나
<저작권소유여부>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문제의 본질은 그런류의 의식과
그것이 빚어내는행태에 있겠지요,
가령 <당근과 채찍>으로 줄세우기
좋아하는 교육당국과 그 책임자들의
행태를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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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0 10:06:24
0 0
별별 (59.XXX.XXX.178)
지금이 왕조시대도 아니고, 한사람의 억울함이 중요한것이 아닙니다.
*전국민들의 공분을 산 이런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합니다.
교과서 국정화 파동으로부터 이어지는국수주의자들의 심각한 정신상태를 치유해야 할 시점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망각하고 먼 미래의 지향점을 흐리게 하는 추잡한 사고를 가진자가 교육부의 핵심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음에 능지처참을 하여도 분이 풀리지 않는 현실입니다.

나향욱같은 무리들이 집권층에 포진하고 있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둡게하고, 이를 청산하지 못한 책임은 친일파 극우 보수주의자들의 준동에 의한 것입니다.

제목을 잘못 뽑으신 칼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를 사는 지식인들이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평범한 보통시민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일을 안해야 합니다.

이 시점에 변명이라뇨? 연좌제가 있다면 대대손손 이땅에 발 붙이고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깨끗하게 과오를 시인하는 자세도 없는 변명하는자에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그만하지만 곡학아세하는 것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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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0 10:04:21
3 0
꼰남 (112.XXX.XXX.25)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8장14절 중에서)

자유칼럼 운영진 여러분 회의 좀 하셔야겠습니다.
답변달기
2016-07-20 09:20:32
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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