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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즐기는 핑크
안진의 2016년 08월 24일 (수) 03:12:26

사춘기의 절정에 이른 딸아이가 “핑크 핑크”를 외치며 다닙니다. 자신의 방안 가구와 각종 소품들을 핑크로 바꾸겠다고 아우성입니다. 핑크를 외치는 딸아이의 볼도 핑크 빛입니다.
 
딸아이는 초등학교엘 다닐 때만 해도 분명 분홍색을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분홍이 좋아졌느냐고 물으니, 분홍은 너무 약한 여자를 의미하는 것 같고, 마치 공주병에 걸린 아이처럼 유치해 보여 싫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남들이 어찌 보든 상관없다며, 그저 분홍은 예쁜 색이고 마음이 끌린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도 딸아이처럼 중학교 시절 잠시 분홍을 좋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앨범 속 사진을 보면 옷이랑 가방이랑 분홍이 자주 눈에 띄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당시만 해도 좋아하는 색을 물어보면 분홍이라고 선뜻 답하지 못했습니다. 왠지 파랑이라 이야기해야 멋있어 보이는 느낌마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속으론 좋아해도, 좋다고 말하는 것을 다소 꺼리는 색이 있다면 바로 분홍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홍이 지나치게 여성성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홍이 사실 여성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전만 해도 미국과 유럽에서 분홍은 소녀가 아닌 소년의 색이었습니다. 1918년 미국의 여성 월간지 더 레이디스 홈 저널(The Ladies Home Journal)에도 “핑크는 강렬한 칼라이기 때문에 남자아이에게 더 적합하다. 하지만 블루는 좀 더 부드럽고 앙증맞아서 여자아이들에게 잘 어울린다.”는 글이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핑크와 블루를 보는 색채 심리는 지금과 달랐던 것입니다.
 
서양에서뿐 아닙니다. 남녀유별을 강조했던 조선시대에 이명기가 그린 조선 중기 문신 허목의 초상화를 보면, 담홍색 관복은 미수 허목의 시원하고 강직한 인품을 고스란히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 문신 채제공의 초상화에도, 사모에 관대를 하고 부채를 들고 향낭을 찬 채제공의 흉배 없는 분홍색 관복차림이 있는데, 그 분홍은 위상을 표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처럼 어느 하나의 성적 정체성을 띤다고 볼 수 없었던 분홍이 여성의 색이 되고 파랑이 남성의 색으로 인식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열거됩니다. 먼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붉은색을 비롯한 군복들이 인디고 블루로 바뀌는데, 어쩌면 그 군복의 푸른색이 남성의 이미지로 각인되고, 파랑은 남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점차 전이되었을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마케팅의 측면에서 분홍을 여성의 소비 형태로 작동하게 한 상술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마케팅을 통해 분홍은 소녀들의 삶에 깊숙이 침투하였고, 이로써 분홍은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존속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홍은 사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색이지만,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분홍은 자신감이 없고 천박하며 유치하다는 인식이 지배하기도 합니다.
 
핑크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영화 <금발이 너무해: Legally Blonde>에도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금발머리 엘 우즈. 그녀의 의상, 가방, 선글라스, 노트북, 애완견의 옷까지, 그녀를 표현하는 것은 온통 핑크입니다. 하지만 이 모습은 남성의 관점에선 지성과는 거리가 먼 백치미로 느껴지고, 결국 하버드 생 남자친구에게서 이별을 통보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사에 긍정적이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엘 우즈는 열심히 노력하여 하버드 로스쿨에 들어가고, 나아가 핑크빛 구두와 슈트 차림으로 법정을 또각또각 걸어 다니며 재판에서도 멋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성은 자신을 가꾸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것을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성취해 가는 엘 우즈의 핑크빛 모습은 편견을 집어치우라는 듯, 사랑스런 모습과 함께 통쾌함을 줍니다.
 
영화 속 분홍은 여성성을 드러내고 있지만 결코 나약함이 아니었습니다. 분홍은 달콤하며, 분홍의 방에 있으면 스스로가 아름답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분홍도 밝기와 순도에 의해 다양한 뉘앙스를 줍니다. 파스텔 톤의 연한 분홍은 우리의 피부색과 비슷하여 마치 살을 만지는 듯 고운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사람의 심리를 안정시키는 평온한 색이 됩니다.
 
분홍이 필요할 때, 분홍을 원할 때,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은 보기 좋습니다. 색에는 편견이 없습니다. 맥락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반드시 여성이기 때문에 핑크를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선호색은 남녀의 성별을 초월합니다. 혹시라도 타인의 시선 때문에 분홍색을 꺼려했다면 이제 더욱 당당하게 분홍을 즐겼으면 합니다.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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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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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우 (121.XXX.XXX.50)
맞아요. 다 나름의 생각과 가치관 차이라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월과 환경에 따라 언제든지 변하지요. 저도 남자이지만 핑크색을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나이든 지금도 좋아합니다. 그 사이에 청장년의 때를 지날 때는 파란 색을 꽤나 좋아했지요. 그때마다 자꾸 변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자신감과 자신의 인생에 대한 가치관이지요. 함께 사는 사회의 공익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뭐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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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5 11:21:07
0 0
임종건 (121.XXX.XXX.2)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로 시작하는 봄날은 간다의 분홍이군요. 꽃에도 온갖 색의 꽃이 있지만 분홍계통의 꽃이 가장 많지 않던가요.
여자는 꽃에 비유되고 꽃은 분홍계통이 흔하고 그래서 분홍이 여자의 색깔이라고 하는 것은 편견 이전에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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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4 22:35:04
0 0
정범구 (175.XXX.XXX.182)
아~ 색채에도 gender가 있군요. 하긴 아기옷 고를 때 여자아이는 핑크, 남자아이는 블루가 거의 상식 아닌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오랜만에 글로나마 뵈어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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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4 10:27:36
0 0
도시내골 (210.XXX.XXX.137)
안작가,
오랜만이에요.
글도 쓰시고 반갑습니다.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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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4 09:04:10
0 0
자작나무 (221.XXX.XXX.190)
색에는 편견이 없으나,
<맥락의 차이>는 참으로 큰 듯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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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4 07:42:54
0 0
꼰남 (175.XXX.XXX.143)
상식으로 알고 있는 색의 성격은 편견에 기인한 것이었군요.
그 편견을 속성이나 성정으로 오해해 분쟁의 소지가 됐던 거
생각하니 우습습니다. 누가 뭐래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취미든 기호든 삶이든 소신껏 폴리 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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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4 07:42:12
0 0
한 팡세 (118.XXX.XXX.250)
저는 푸른색을 좋아하니까 남자군요. 아! 원래 남자죠. 색채에도 이렇게 숨은 뜻이 많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언젠가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단순할 수록 강한 색을 좋아한다는 내용이 생각나네요. 아프리카 밀림에 사는 사람들이 그래서 빨갛거나 파랗고, 희거나 검은색을 좋아하는 이유가, 생각이 단순해서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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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4 07:17:1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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