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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주례사
임철순 2007년 11월 28일 (수) 03:34:59
요즘 결혼식은 참 별나고 요란합니다. 신랑신부가 연예인 뺨치게 뽀뽀하고 노는 모습은 물론, 그들의 어린 시절까지 영상으로 보여 줍니다. 예전에는 신부를 아버지가 이끌고 들어왔지만 지금은 신랑과 함께 입장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어떤 신랑녀석이 신부 앞에 한 쪽 무릎을 꺾고 ‘사랑의 맹세’ 비슷한 자작시를 낭독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체질이 안 좋은 탓인지 그런 걸 보면 바로 닭살이 돋습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긴 주례사입니다. “혼인은 二姓之合(이성지합)이요…검은 머리, 파뿌리…”하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습니다. 최근 어떤 결혼식에 갔다가 주례가 말이 많기에 좀 짜증스러워져서 옆 사람에게 “스커트와 스피치는 짧을수록 좋은데…”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내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곧 말씀을 끝내서 참 다행스러웠습니다.

어쩌다 보니 나도 벌써 주례를 세 번이나 섰습니다. 2년 전 아들을 장가 보내는 대학동창의 부탁을 처음 받았을 때, 문자 그대로 기가 꽉 막혔습니다. 주례를 서라고? 내가 벌써 그렇게 늙었나?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를 받아도 화가 나 죽겠던데….

별별 이유를 대며 못 하겠다고 버티다가 그 부인의 간곡한 부탁에 지고 말았습니다. 그 날부터 신랑신부보다 내가 더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되나? 새로 삶을 시작하는 청춘남녀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나침반이 되는 말이 뭘까? 되게 멋지고 그럴 듯한 말을 해서 신랑신부는 물론, 가족과 하객들을 다 죽여 놓아야 하는데…. 보고 읽는 것마다 주례사에 써 먹을 수 없을까, 그 궁리를 하게 됐습니다.

잘 할 자신은 없었지만, 절대로 길고 장황하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부터 했습니다. 그리고 고심참담 끝에 아래와 같은 불후(!)의 주례사를 작성하게 됐습니다(괄호 안의 *표시가 된 말은 지금 내 생각입니다).

저는 30년 넘게 신문기자로 일해온 사람입니다. 그 동안 제가 한 일은 뉴스를 찾아내 조금이라도 빨리,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오늘 XXX씨와 OOO씨가 결혼을 한다는 뉴스, 그것도 아주 기쁜 굿 뉴스를 알려 드리게 됐습니다. 이것은 저의 대단한 특종기사입니다(*말은 그럴 듯하지만 공허하구나!).

주례를 맡고 난 뒤, 어떤 말을 해주는 게 좋을지 여러 사람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며 여기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이 결혼을 함께 기뻐하는 여러 사람의 메시지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저는 기자입니다. 평생을 소통의 문제, 즉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갖고 일해온 사람입니다(*정말 그랬나? 과장이 좀 심하군).

고등학교 때 읽은 법정 스님의 글에 [함께 있고 싶어서]라는 게 있었습니다. 남녀가 결혼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늘 함께 있고 싶어서라는 것입니다. 함께 있는다는 것은 함께 웃고 함께 운다는 것이며, 결혼식이란 결국“우리는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이제부터 늘 함께 있겠습니다”하고 널리 알리는 행사입니다(*밤에도 함께 잔다 그 말이지).

늘 함께 있기 위해서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항상 유지돼야 하며 그 마음을 상대방이 잘 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즉 커뮤니케이션이 잘 돼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신자인 신랑신부는 이미 전생과 금생, 아울러 내생까지의 연분에 의해 맺어진 사이입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이 많고 상대의 단점을 뒤늦게 알게 돼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에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첫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상대방을 늘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용서해 달라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녀는 평등합니다. 누가 더 낫고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항상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그러는 그대는 그렇게 하는가?).
둘째로, 늘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박쥐는 먹이를 찾기 위해 아주 듣기 싫고 높은 소리를 냅니다. 그 소리가 벌레에 부딪치면 박쥐는 벌레가 있는 곳을 정확히 알게 됩니다. 그러나 고래는 아주 낮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데도 하와이에서 알래스카까지 갈 정도로 멀리 전달된다고 합니다. 고래는 그렇게 해서 아주 멀리 있는 친구도 찾아냅니다(*멋있게 말하려고 꽤나 애썼어).

소리를 지르거나 잔소리를 하는 것은 박쥐가 벌레를 잡아 먹듯이 사랑과 믿음을 스스로 깨는 행위입니다. 반면 낮고 부드러운 소리로 말하면 고래가 먼 곳의 친구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듯이 항상 사랑과 고마움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더 잘 들리고 낮은 속삭임이 더 듣기 좋습니다.

셋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함께 있으면서 따로 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정스님의 글에도 거문고는 한 가락에 울리지만 그 줄은 따로 따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서로 얽어 매지 말고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의 마음과 일을 존중해야만 늘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유지될 것입니다(*너는 너 나는 나, 이걸 잊으면 안 돼!).

최근 전시회를 연 여성화가 황주리는 사랑에 대한 질문을 받고 완전한 소통을 열망하는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완전한 소통을 이룩한 상태가 아니라 그렇게 되려고 열망하는 게 사랑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완전한 소통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이 늘 유지되도록 하십시오.

마지막으로 특별 주문을 하겠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우리나라는 출산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습니다. 되도록이면 아이를 많이 낳아 국가와 사회에 큰 기여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사동에서 산 한지공책에 이런 말을 붓글씨로 써서 읽었습니다. 장갑 낀 손으로 공책을 넘기는 게 어려워 약간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더듬거리지 않고 진지하고 낭랑하게 잘 읽었습니다.

주례사를 낭독하는 동안 장내가 너무도 조용해 말을 하고 있는 내가 겁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다녀본 결혼식장 중에서 제일 조용했습니다. 공책을 넘기는 단절과 여백의 시간이 정숙과 긴장을 유지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됐던 것 같습니다.

예식이 끝난 뒤, 신랑 어머니가 “대만족이에요”라고 말해 주어서 다행스러웠습니다. 신랑의 누나가 “제가 결혼할 때는 주례사가 하나도 안 들리던데 오늘은 귀에 쏙쏙 들어오던데요” 하기에 “그때는 너무 긴장하셨겠죠”하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항상 장난치고 농담하는 걸 좋아하는 내가 근엄하게 주례까지 섰으니 그 날은 나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주례사 공책은 당연히 신혼부부에게 주었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회사의 대선배에게 주례를 부탁했는데, 제주도 신혼여행을 다녀와 인사하러 갔더니 그 할아버지가 “누구~시더라?”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주 정성껏 좋은 주례를 한 셈입니다. 무엇이든지 정성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애를 많이 낳으라는 말이 부담스러웠는지 그 부부는 다음해 남녀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대학동창이 “네가 애 많이 낳으라고 했잖아” 그러더군요.

이렇게 해서 나는 2005년 10월, 대한민국 주례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던 것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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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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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oco (211.XXX.XXX.129)
이 글 쓰고 난 뒤 농반 진반의 주례부탁을 여러 건 받았습니다만 정중히 사절합니다.
그 이유:1)항상 좋은 말을 해 줄 밑천이 없다 2)주말에 시간을 너무 빼앗긴다
3)주례 서봤자 나중에 사진도 안 주고 연락도 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등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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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1 17:51:57
2 2
이용백 (211.XXX.XXX.130)
완전한 소통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이 늘 유지되도록 하라는 말, 정말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저도 결혼생활 이제 20여년에 육박(?)하는데 아내와 소통을 이루는 게 쉽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시대 모든 부부에게 주는 말씀으로도 손색이 없는 듯 하군요.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건승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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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13 10:4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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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tham (116.XXX.XXX.42)
부부가 꼭 가슴에 새겨두어야 하는 이야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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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8 23:4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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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원 (203.XXX.XXX.46)
주필님 정말 최고의 주례사입니다.(*너무 과찬인가????)
저는 대학교때 철학을 부전공해서 중세철학을 전공하시는 철학교수님이 하셨는데... 지금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 참 멋있게 하시는구나 하며 한말씀 한말씀 귀기울여 들었는데, 그때보다 더 멋드러지신 주례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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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8 09:15:59
2 2
수지 큐 (65.XXX.XXX.3)
이색적이고 드문 주례 선생님 주례계에 데뷔 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저도 독신주의를 버리고 결혼 할 생각이 듭니다.
정성이 든 주례사와 한지 공책 멋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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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8 07:3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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