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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의 길 트레킹과 포터
박대문 2017년 02월 15일 (수) 00:40:50

트레킹(treking)에 포터(porter)가 필요한가? 트레킹이란 등산이 아니라 전문적인 등산 기술이나 지식 없이도 즐길 수 있는 자연 답사 도보 여행을 말합니다. 어쩌면 신라 시대의 화랑도 수행이나 조선 시대 선비들의 산천경개 유람과 같은 것입니다.

근래 들어 트레킹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아마도 2007년 제주 올레길이 개발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주 올레길이 유명해지면서 지자체마다 다투어 둘레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서울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러한 둘레길을 트레킹 하는 데에 포터가 필요 없습니다.

작금의 트레킹이라는 용어의 정착은 전문 산악인들이 개발한 네팔의 히말라야 등 험한 산악길이 일반에게 공개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이러한 트레킹에는 포터가 자연스레 따라붙습니다. 일반 관광 트레커의 편의를 위해 단순한 노무를 제공하는 임무입니다.

이번에 3박 4일의 ‘마추픽추로 가는 잉카의 길’ 트레킹을 다녀왔습니다. 잉카의 길은 잉카 시대에 제국의 변방 먼 구석까지를 관리 통치하기 위하여 구축한 전국 연결 도로망입니다. 수도 쿠스코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쳐 있었는데 잉카 전성기에는 이 길의 총연장이 3~4만km나 되었다고 합니다. 잉카의 길에는 땀보(tambo)라는 객사를 설치했고 이 길을 따라 차스끼(chasqui)라 부르는 파발꾼이 바람처럼 나는 듯이 사방으로 달려 나갔다고 합니다. 땀보와 차스끼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했던 몽골 평원의 원나라가 정보통신망으로 이용했던 역참제와 같은 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잉카의 길 중 가장 인기 있는 길이 마추픽추로 가는 잉카의 길(Inca Trail to Machu Picchu)입니다. 이 길은 오얀따이땀보에서 마추픽추까지 안데스 산맥의 자연과 잉카 유적지를 보고 느낄 수 있는 45km의 고원지대 산길입니다.

오늘날은 잉카 제국의 혼이 담긴 유서 깊은 잉카의 길을 전 세계의 관광객이 유유자적하며 트레킹하고 있습니다. 몰락한 제국의 후예들은 포터가 되어 관광객의 짐 보따리를 대신 짊어지고 이 길을 달립니다. 잉카 황제의 명령 전파와 긴급 용무를 수행했던 차스끼는 오늘의 포터가 되어 이 길을 달리고 있는 셈입니다. 무상한 역사의 한 단면을 봅니다.

트레킹 첫날 포터와 첫 대면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 일행보다 수가 더 많은 14명이었습니다. 가이드와 조리사 그리고 각종 취사도구와 식재료, 텐트, 침낭, 매트리스, 간이 식탁과 의자 등을 운반해야 하는 요원들입니다. 각자가 담당하는 짐의 무게가 만만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필요한 최소의 장비와 차림으로 최상의 신발을 신고 걸어도 힘들고 어려운 산길입니다. 포터는 무거운 짐을 지고 일행보다 먼저 가서 식사를 준비해야 하고 식사할 장소에 텐트와 식탁을 차려야 합니다. 식사가 끝나고 트레커가 출발하면 설거지와 조리 기구, 텐트, 식탁을 챙기고 뒤처리를 하느라 한참 늦게 따라옵니다. 그러나 트레커가 다음 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가서 또 텐트를 치고 식사를 준비해야 하므로 곧장 달리듯 뛰어야 하는 힘들고 고달픈 일정입니다.

   

고산증과 하루 산행의 피곤함에 몸이 천근만근이라 잠자리 텐트에서 끙끙댑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느라 부산을 떱니다. 고산지대에 우기라서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내렸다 개기를 반복했습니다. 우리는 판초 우의나 오버 트라우저를 입고 걷지만, 포터는 등위의 짐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널따란 비닐 보자기를 짐 위에 걸치고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비닐 보자기 양 끝을 잡고 맨발에 운동화를 신고 걷습니다. 식사하는 동안에 이들 중 일부는 시중을 들지만, 나머지는 비좁은 화장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거나 비닐 조각을 머리 위에 얹고 비를 맞고 있어야 합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계를 위한 이들의 서비스를 받으며 트레킹을 하는 것이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고산지역에 적응하여 살고 있으며 수년간 포터 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그들 역시 초인이 아닌 우리와 같은 인간들인데 어찌 힘들지 않겠습니까? 포터들을 소개할 때 보니 나이가 20대에서 50대 후반까지 있었고 더구나 그중 한 명은 팔이 하나 없는 외팔이였는데 그 역시 같은 크기의 짐을 메고 달려야 했습니다. 값싸고 부질없는 측은지심이 일면서 목구멍에 왈칵 눈물이 흘러들었습니다. 멀리 동양의 코리아에서 온 손님을 위하여 무거운 짐을 메고 걸어야 하고 꼭두새벽에 일어나 아침 식사 준비를 하느라 차가운 밖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여야만 하는 잉카제국의 후예들, 이들을 보면서 어렵고 가난했던 지난날 우리의 아픔이 되살아 난 것은 어인 청승일까요?

일제 강점기에 지리산 노고단에는 외국인 선교사 별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별장에 가려면 화엄사 뒤 가파른 비탈길인 속칭 코재를 올라가야만 합니다. 나이 많고 비만한 외국인 선교사가 그곳에 갈 때 사인교나 들것에 실려 갔다고 합니다. 그 가마꾼 노릇을 했다는 동네 아저씨 말씀입니다. ‘돈벌이 없어 배고프고 가난한 그 시절에는 사인교나 들것을 서로 메려고 기를 썼다. 산행 가마꾼 노릇 한 건 하면 큰 횡재를 한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기가 막히게 슬픈 일제 강점기 시대의 서글픈 우리의 실상이었나 봅니다.

‘돈이면 산 호랑이 수염도 뽑아 온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錢)의 위세로 잉카제국 후예인 포터의 서비스를 받고 왔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넘기기에는 왠지 가슴 한구석이 미어지는 안쓰러움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오늘의 코리아가 있기까지 자신의 한 몸 부스러지고 사그라지면서까지 우리 경제를 끌어 올린 60년대, 70년대의 산업일꾼들의 고마움을 새삼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잉카 트레킹을 함께하면서 성의껏 최선을 다했던 포터들에게 감사드리며 그들의 장래도 환하게 밝아졌으면 하는 소망을 전하고 싶습니다.

 

(2017. 2. 3. 잉카의 길 트레킹을 마치고)

                                                                                                                      

 

 박대문


환경부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과장, 국장, 청와대 환경비서관을 역임했다.우리꽃 자생지 탐사와 사진 촬영을 취미로 삼고 있으며,
시집 『꽃벌판 저 너머로』, 『꽃 사진 한 장』, 『꽃 따라 구름 따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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