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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고종명(考終命)
유능화 2017년 06월 05일 (월) 00:01:08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 한평생을 살아가는 삶의 가치와 목표는 오복(五福)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복은 천수를 누리며 사는 수(壽),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평안하게 사는 강녕(康寧),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사는 부(富), 덕을 베풀며 사는 유호덕(攸好德), 천수를 누리고 자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편안히 눈을 감는 고종명(考終命)입니다.

오복 중에 일생을 마무리하는 고종명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세상과 하직하는 복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날씨와 계절의 운도 따라야 이루어지기에 가장 힘들며 또 한편 두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아버지(97세)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5복 중 4복은 어느 정도 누렸는데 고종명의 복은 어떨는지…”

지난 21일(일) 아버지가 기거하시는 실버 아파트에서 함께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강당에서 영화 ‘노팅 힐’도 함께 관람했습니다. 영화를 본 후 간호과에서 혈압을 재어보니 완전 정상이었습니다. 산책을 하자고 하셔서 아파트 정원을 같이 거닐었습니다. 그런데 4시 반경 아버지는 갑자기 중심을 잃으면서 바닥에 주저앉으셨습니다. 혼자서는 부축하기 어려워 간호 직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방으로 모셨습니다.

“큰애야, 나 골절이냐?”
“아버님, 골절은 절대로 아닙니다.”
“왼쪽 다리에 힘이 없구나.”

지금 생각해보니 뇌졸중이 온 것이었습니다.

“다리에 힘이 없구나.”
“아버님, 다리 좀 움직여 보세요.”

오른쪽 다리는 움직이는데 왼쪽 다리는 전혀 못 움직이셨습니다. 아버지의 안색이 안 좋아졌습니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119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119 구조팀이 아버지를 모시고 목동병원 응급실로 도착한 시각이 5시 30분. 아버지가 쓰러지고 불과 1시간 만이었습니다.

의료진은 아무리 애를 써도 시시각각으로 상태가 안 좋아지니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연명 치료를 거부하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특별히 더 할 치료는 없었습니다. 모든 가족들에게 응급상황을 알리니 다들 달려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7시 반쯤 호흡을 멈추셨습니다. 그야말로 누구나 원하는 고종명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삼일 앓으신 것도 아니고 세 시간 만에 운명하신 것이니 최고의 고종명을 맞이한 셈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일제시대에 의사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삼 형제가 의도(醫道)를 걸었습니다. 삼 형제가 힘을 합쳐 병원을 세우셨으니, 바로 삼일병원입니다.

아버지께서 일찍 의업의 길을 걸으셨기에 우리 형제들은 비교적 순탄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말년에는 장학재단을 세우시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셨습니다. 실버 아파트에 들어오신 후로는 근무하는 직원 자녀들에게도 장학금을 주어 직원들도 대단히 고마워했습니다. “요새는 학생들에게 장학금 주는 재미로 산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오복(五福)을 요샛말로 표현하자면 웰 리빙(Well living)과 웰 다잉(Well dying)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고종명의 복까지 누리셨으니 여한이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입관하는 날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는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버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달리 생각나는 말이 없었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나, 집안의 어른으로서나, 의료인으로서나 아버지는 정말 큰 나무였습니다.

“아버님,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어머님 곁으로 가셨으니 얼마나 좋으세요? 저희들 사는 모습을 보시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으실 수 있도록 저희들도 노력하겠습니다. 아버님, 감사했습니다. 아버님, 사랑합니다.”

 

   

 

유능화

 경복고, 연세의대 졸업. 미국 보스톤 의대에서 유전학을 연구했다. 순천향의대 조교수, 연세의대 외래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서울시 구로구 온수동에서 연세필 의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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