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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 음악 한담(閑談)
허찬국 2017년 08월 23일 (수) 00:01:13

방학 기간의 호사는 미루었던 책을 읽거나, 긴 시간을 요하는 논문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주중 저녁 연주회에 가는 여유도 누리지요. 연구실에서 유튜브의 음악을 틀어놓고 일을 할 때가 많습니다. 현악/실내악곡을 많이 듣는데 처음에 고른 곡이 끝나면 비슷한 장르의 다른 음악이 이어지기 때문에 보통 유튜브 화면이 글이나 자료 화면으로 덮여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조용한 음악이 끝나더니 음악소리에 섞여 떠들썩한 말과 웃음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와 화면을 확인했습니다. ‘송어’ 부제가 붙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였습니다. 좋아하는 곡이라 가끔 듣던 것인데 처음 보는 화면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악기 편성과 연주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피아노 다니엘 바렌보임, 바이올린 이츠하크 펄만, 비올라 핀커스 주커만, 첼로 자클린 뒤프레, 베이스 주빈 메타입니다. 이들 중 제일 어린(1948년생) 주커만이 21세, 제일 연장자이며 당시 로스앤젤레스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 메타가 33세였던 1969년 바렌보임이 자신이 주관하는 연주회(Southbank Music Festival)에 가까운 동료들을 모아 진행한 공연 준비 과정과 실제 연주를 기록한 다큐멘터리(제목 'Trout')였습니다.

뉴욕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로 오래 재직하며 거장의 입지를 공고히 한 메타가 젊은 시절 베이스 연주를 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역시 지휘자로 활약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태생의 바렌보임은 원래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쌓았고 당시 뒤프레와 결혼했지요. 지금은 중동의 분쟁지역 젊은 연주자들로 서동시집관현악단(West-Eastern Divan Orchestra)을 결성하여 갈등 해소를 위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국적을 취득한 최초의 이스라엘 시민이라는 사실이 그의 행보를 보여줍니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 다발성 경화증(MS)이 나타나 연주 활동을 못하게 되었고 42세에 타계한 뒤프레에 대한 설명에는 ‘천재’, ‘비운’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그의 언니의 자전적 책에 바탕을 둔 ‘힐라리와 재키’라는 영화가 1998년 만들어졌고 두 여배우가 아카데미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지요. 일부 동료 연주가들은 영화가 지나치게 왜곡해 극화했다고 항의했다고도 합니다. 이번 10월 바렌보임은 전 부인의 타계 30주기를 기리는 MS연구 기금 모금 서동시집관현악단 공연을 연다고 합니다.

비슷한 연배의 펄만과 주커만은 이스라엘 태생으로 둘 다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일찍 미국의 줄리아드학교에 수학했습니다. 주커만도 바이올린 연주자이지만 이 곡의 공연에서는 비올라를 연주합니다. 오래전 미국에서 처음 연주회에서 보았을 때도 비올라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펄만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보였는데 폴리오로 다리가 마비되며 양팔에 보조 지팡이을 사용합니다. 연주회에서는 무대 등장 및 퇴장 때 관현악단의 지휘자나 공연자가 펄만의 바이올린과 활을 대신 들고 움직였습니다. 몇 년 전 대전 예술의전당에서 그의 독주 공연이 있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연주회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전의 철제 지팡이 대신 소형 전동차로 무대에서 이동하는 것이 좀 편해 보였습니다.

다큐멘터리 속 천재 연주가들의 발랄한 농담과 장난은 여느 죽이 잘 맞는 젊은이들이 노는 모습입니다. 상대방의 악기로 능숙하게, 혹은 익살스럽게 연주하기도 하고 거침없이 농담을 나눕니다. 빈곤하게 살다 요절한 슈베르트가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을 것 같습니다. 실제 연주가 시작되면서 모두들 심각한 모습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호흡을 맞추어가며 슈베르트가 20대 초에 작곡한 더없이 아름다운 곡의 선율을 주고받으며, 혹은 화음을 이루며 연주했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무대 뒤로 돌아왔을 때에는 10년 만에 악기를 든 메타가 놀림거리였습니다. 베이스 연주를 곧잘 하니 보스턴 교향악단에 자리가 있다더라 하면서 저명 지휘자를 놀리며 새파란 젊은이들이 박장대소합니다. 우아한 자태의 뒤프레도 깔깔거리며 웃고, 기량을 뽐냈습니다. 걱정과 두려움이 없이 천진난만하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며 즐거워하는 半세기 전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긴 앞머리를 날리는 주커만의 화면 속 모습은 요즘 아이돌과 흡사했습니다. 3년 전 통영에서 실제 연주를 본 것이 최근의 조우였습니다. 이제는 숱 많은 순백의 머리와 온화한 인상의 중후한 장년의 모습입니다. 아마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다른 누구보다도 많이 달라 보이는 것같습니다.

펄만을 보았던 대전 예술의전당에서 지난주 게잘리우스라는 예명으로 집시풍 음악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바이올린 연주자의 ‘보헤미안 비르투오지’ 공연을 보았습니다. 파격적인 복장으로 드뷔시에서 피아졸라까지 다양한 곡을 연주하며 기량을 뽐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TV와 유튜브 등을 통해 알게 된 영재 바이올린 연주자 고소현 양이 가까운 객석에 있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2006년생인 소현 양은 집이 서울이지만 레슨을 위해 대전에 들렀다가 연주회에 왔다고 했습니다. 나중 검색해보니 작년 성남아트센터에서 주커만과 함께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곡을 공연하며 더 유명해진 모양입니다.

작년 공연의 화면 속에서 연주가 끝나자 주커만은 어린 동료 연주자를 꼭 안아줍니다. 아마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영재 시절, 20대 초반 때 뒤프레 등 친구들과의 런던 공연 등 생각이 지나가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소현 양도 잘 자라 훌륭한 연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작업 중인 논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개강 날은 성큼 다가왔습니다. 이제쯤은 좀 담담해질 만도 한데 가는 여름방학이 아쉽습니다.


다큐멘터리 ‘Trout’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ZZdXoER96is&t=850s

고소현-주커만 공연 실황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rlmseKuTC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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