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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경쟁 압력과 임금 정체
허찬국 2017년 10월 26일 (목) 00:12:46

주요 선진국들에서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와 대불황 이후 크게 악화됐던 일자리 문제가 많이 완화되었지만 임금이 정체된 것은 우리나라 사정과 비슷합니다. 경제 국수주의로 이 문제의 해결을 공약한 후보가 자질논란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선에서 승리했습니다. 국내에서도 일자리 창출과 최저임금 대폭 인승을 내세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나라 안팎에서 일자리와 임금에 대한 걱정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런 추세의 원인이 복잡다기해 단순 명쾌한 해법을 제시하는 경제전문가는 몰라서 용감한 것이거나, 또는 시골 오일장 만병통치약 약장수입니다.

근래 뉴욕타임스에 노동시장 추세를 다룬 두 기사가 있어 소개합니다. 먼저 미국의 과거와 현재의 두 여성 건물 청소원의 예를 들어 사정이 어떻게 달라졌나를 보여주는 기사입니다. 에반스는 1980년대 초 뉴욕주 로체스터市에 있는 필름과 카메라로 유명한 이스트만 코닥(Eastman Kodak) 본사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는 현재 캘리포니아주의 쿠퍼티노市에 소재한 애플(Apple) 본사 건물을 청소하는 일을 하는 시급 16.6달러의 근로자 라모스입니다.

그 사이 물가가 오른 것을 감안하면 에반스나 라모스의 시급 수준은 비슷합니다. 30년 넘게 비숙련 근로자의 임금이 실질적으로 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나마 닮은 점은 이게 전부입니다. 에반스는 당시 코닥사의 정규직원이어서 4주의 유급휴가와 매년 보너스까지 받았던 것에 비해 라모스는 애플의 청소를 맡은 외주업체에 소속되어 있고 비싼 생활비 벌기에 빠듯해 휴가는 남의 일인 처지입니다.

에반스는 일을 하면서 지원을 받아가며 시간제로 대학 공부를 할 수 있었고, 회사에서는 컴퓨터 공부를 한다는 것을 알고 일하는 틈틈이 다른 직원들에게  엑셀과 같은 스프레드시트 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 대학과정을 마치자 IT부서 전문직 자리로 승진시켰습니다. 그 후 10년도 못 미쳐 그녀는 코닥의 기술분야 최고 임원이 됩니다. 이후 여러 다른 회사의 임원을 역임한 후 현재 대형 인력관리회사의 고위직 임원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에반스의 입지전 같은 사내 발탁과 승진은 종종 있었습니다. 애플에서 일하는 라모스는 학교에 돌아가 공부하는 것은 꿈도 못 꿀 처지입니다. 그녀에게 승진이라고 해봐야 다른 청소원 몇 명을 관리하는 자리이고 애플사의 직원이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로체스터 지역에는 약 반세기 넘게 일자리와 소득을 창출한 대기업 코닥 덕에 두터운 중산층이 만들어졌습니다. 30년 전 코닥은 현재 가치로 평균 7만9천 달러의 연봉을 받는 직원 약 6만 명을 고용했습니다. 과거 근무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족처럼 대해준 좋은 회사였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 사진 개발의 선두 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변신에 실패한 코닥은 쇠락했습니다. 파산 끝에 회생한 코닥의 현재 미국 내 고용 인력은 2천7백 명에 불과합니다.

여러 직종의 많은 인력을 직접 고용했던 코닥과 달리 엄청난 매출 규모에 비해 애플의 고용규모는 작습니다. 현재 본사에서 일하는 직원은 약 2만3천 명 정도이고 평균 연봉은 수억 원대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이폰은 부품생산부터 최종 조립단계까지 전 과정을 외주에 의존하는 것으로 잘 알려졌지요. 애플은 소프트웨어를 본사에서 만들면 전 세계 사용자들에게 직접 인터넷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핵심 역량분야 인력만 보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소프트웨어를 감수하는 일까지도 외주에 의존합니다. 경쟁압력에 인건비 절감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평가입니다.

두 번째 기사의 내용은 유럽 등 선진국의 일자리가 몇 년 전에 비해 가시적으로 늘었지만 임금은 제자리걸음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실업률은 2008년 위기 직후 10% 선에 육박했었는데 이제는 실질적 완전고용 수준으로 여겨지는 4%대 초반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기 이전 연평균 약 4% 이상이던  임금상승률이 최근에는 3%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물가상승이 명목 임금 상승을 앞질러 실질 임금이 오히려 하락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노조가 약해졌고, 기업들은 임시직에 의존하는 동시에 자동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중간 기술 수준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세계화의 영향으로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이 중남미와 아시아에서 생산되고, 경쟁압력이 높아지고 있는 것을 이유로 꼽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복지국가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노르웨이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동유럽 근로자들 유입이 늘며 임금을 압박하고 있고, 경제 상황이 크게 나빴던 스페인, 이탈리아 회사들이 각종 건설공사를 저가에 수주하며 노르웨이 기업들과 노조를 어렵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인근 경제 대국 독일이 제조업 수출경쟁력 제고를 위해 노사가 합의해서 임금 상승을 자제하는 것도 한 요인입니다. OECD 통계에 따르면 지난 수년 간 임금 증가율이 계속 하락했고 작년에는 1%를 밑돌았습니다. 산유국인 노르웨이 사정이 어려워진 데에는 유가 하락도 기여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큰 추세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즉, 우리만이 피해자가 아닌 거지요. 오히려 그 동안 기존 선진국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의 제품이 선전하면서 이들에게 한국의 부상은 세계화 압력의 화신입니다. 우리 기업들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핵심역량에 집중하면서 수출시장에서 경쟁력이 높아진 결과입니다. 이는 앞서 본 애플사와 비슷하게 고용 인력을 최소화하고 외주를 늘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출호조에도 불구하고 내수 분야에서 조직화된 경제활동이 부진했습니다. 점점 가계나 기업의 소득이 양극화 되었습니다. 

정부는 최저임금을 크게 올리고 노동계에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경제 활성화를 꾀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느는 것을 원치 않는 근로자는 없을 터이지만 경제적 타당성이 약한 임금 상승은 사용자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자영업자와 같이 사용자 자신이 취약계층인 경우는 더 그렇겠지요.

최저임금 근로자와 같은 취약 계층의 사정을 개선해서 소득격차를 완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급속한 임금인상보다는 사회보장제도의 강화를 통해 직접 이들의 사정을 개선하는 것이 비교적 부작용이 적은 방안일 수 있습니다. 고소득 계층의 세금 부담을 더 늘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부담이 느는 사람들에게 맡겼던 돈 찾아오듯이 할 것이 아니라 증세의 명분을 설득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도 당당한 우리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새 정부는 성과에 너무 조급해하거나, 부작용이 오래 갈 수 있는 생경한 정책들을 추진하는 데 신중했으면 좋겠습니다. 꾸준한 개선이 단발성 성과보다 바람직해 보입니다. 점차 세계경제 회복의 온기가 노동시장에도 미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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