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칼럼 | 게스트칼럼
     
도돌이표를 붙이지 말아야 할 일
이선영 [시인, 이화여대 초빙교수] 2018년 01월 17일 (수) 00:00:43

얼마 전 연령대가 비슷한 동료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젊은 시절로, 청춘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가가 서로의 질문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답은 망설임 없이 같았는데, 굳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추가로 동의한 내용은 다시 젊어지기를 바라기보다 지금 현재의 상태에서 더 늙지만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은 물론 서글프고 씁쓸한 일입니다. 그것은 살아온 날이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이미 충분히 많다는 뜻이고, 무언가 일을 새롭게 벌이기에는 평균적으로 늦은 시점이라는 뜻이고, 그렇기에 운신의 폭이 좁다는 뜻이고, ‘어려 보인다’고 듣던 말이 ‘젊어 보인다’로 바뀌는 지점이라는 뜻이고, 오랜만에 만난 누군가에게서 "왜 이렇게 늙었어?"라는 얼추 질문 형식을 취한 경악의 소리를 듣는다는 뜻입니다(예의상 면전에 대놓고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생각하지만, 대놓고 이런 말을 던지는 사람도 실제로 있습니다).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은 또한 숨길 수도, 감춰지지도 않는 일이기에 서글프고 씁쓸한 일입니다. 간밤에 늦게까지 잠을 설치고 겨우 일어난 일을 안색은 숨겨 주지 않습니다. 집안에서 말다툼을 한 뒤 나섰거나 시도했던 일이 좋지 않은 결과로 나왔을 때의 우울함을 표정이나 분위기는 감춰 주지 않습니다. 관리되지 않은 피부와 매무새, 웰빙이 아닌 식생활과 영양, 품격 있지 않은 차와 아파트와 치장소품은 늙음을 품격 있게 가려 주지 않습니다. 나이에 걸맞은 소셜 포지션의 부재와 해외여행 목록의 황량함, 화려하지 못한 자녀의 이력 등은 늙음을 안락한 연착륙으로 유도해 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젊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목록에서 말끔히 삭제하고 싶은 무수하게 많은 낮과 밤, 선택과 결단, 남자와 여자, 말말말과 글, 그리고 치기 어린 수많은 ‘나’들이 있던 생의 장면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셋하고 싶지만, 아마 리셋해도 똑같은 어리석음을 되풀이 실행하리라는 이 ‘불길한’ 예감이 맞다면 젊음의 생방송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다시 그 꼴불견의 진통 아닌 진통을 맛보고 싶지 않습니다. 늙은 스크루지도 한 번 울고 참회한 것을 두 번 울어야 한단 말인가요….

그럼에도 털어놓자면, 다시 돌아가 되돌리고 싶은 구석이 한 군데 있기는 합니다. 거기는 딸아이의 유년시절이 있던 공간이기도 하고 아들내미의 유년이 있던 공간이기도 합니다. 딸아이는 태어나서부터 줄곧 이웃집 아주머니와 할머니, 그리고는 시댁이 있는 시골에 가서 1년, ‘귀경’한 뒤에도 다시 5년 정도를 외할머니와 함께 자랐습니다. 둘째인 아들내미도 일찌감치 낙향한 바람에 다섯 살이 될 때까지 떨어져 살았습니다.

임산부였기는 했지만 채 ‘엄마’는 아니었고, 엄마였지만 한동안 엄마 노릇을 하지 못했으며, 엄마라는 자각이 둔탁해짐과 함께 엄마로서의 기능도 퇴화되어 갔습니다. 수도권과 지방으로 제각각 흩어져 있던 아이들을 겨우 모아 같이 살게 됐을 때에도 아이들을 빨리 재우고 제 일부터 처리하는 것이 삶이자 생활이었습니다. 아이들과의 정서적 교감이나 밀착감, 이런 것은 그 후로도 내내 아쉽고 쓰린 부분입니다.

근래 우리 사회에서는 흉악한 아동범죄가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의 다섯 살 고준희 양 죽음도 그렇고, 엄마의 실화가 원인으로 밝혀진 3남매의 죽음도 그렇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어린이들이 학대와 방치 속에 죽어갔으며 영아 유기 사건도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그런 사건들을 접하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합니다. 엄마가 된다고 해서, 부모가 된다고 해서 모두가 다 저절로 생리학적인 엄마 이상이 되고 부모 이상이 되는 걸까요? 그저 한때의 임산부로, 아기의 생리학적인 친부로 경험과 기능만 남기는 이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부모가 되는 것에도, 엄마가 되는 것에도 마음의 각오와 사전의 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될 준비, 엄마가 될 준비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세상에는 임산부가 되면 바로 엄마가 되는 것이라는 인식들이 많은 듯합니다. 모태가 되는 당사자인 여성들 가운데도 그러하고, 그러한 여성들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인식 가운데도 그러합니다. 저 역시 한동안은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여성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엄마라는 자의식과 책임감과 모성의 심각성을 실로 ‘심각하게’ 자각하게 된 것은 출산 이후로도 오랜 뒤의 일입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적 구도로 사건을 보는 것에서 조금 벗어나 가해자를 배양하지 않는 사회, 부모와 어른이 행복한 사회가 되어야 아이들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 고로, 영화 <박하사탕> 속 주인공처럼 "나 다시 돌아갈래~!!!" 외치고 싶은 유일한 때가 있다면 바로 아이들의 유년기입니다. 낙제점수였던 수학 시험지나, 실패했던 연애나, 시도조차 못해 본 배우의 꿈이나, 별 볼 일 없는 시인의 자괴감이나, 심지어 ‘무다리’와 굵은 팔뚝도 되돌릴 수 없으면 그만입니다. 구태여 수고롭게 되돌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거는 그냥 저 혼자만의 문제이고, 비극이어도 저 혼자만의 비극이며 저 혼자만의 불행입니다. 저 혼자 죽고 저 혼자 망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엄마가 된다는 것은 저 혼자만의 영역을 넘어서는 삶의 영역입니다. 저 혼자만으로 간단히 끝나지 않습니다. 그때로 돌아가서 엄마인 저를 교정하고 수정한다면, 거기로부터 파생된 우리 아이들과의 지금 현재의 삶의 무늬들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요?

 

                                                                                                                             

 

이선영

1964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90년 월간 <현대시학> 통해 등단. 시집 『오, 가엾은 비눗갑들』, 『글자 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평범에 바치다』, 『일찍 늙으매 꽃꿈』,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 『하우부리 쇠똥구리』 등.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0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