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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때, 반갑고 고마운 말
임철순 2019년 08월 06일 (화) 00:42:50

나는 요즘 한여름 복더위에 1960년대 초의 어느 대학총장 강연록을 읽느라 골치를 썩이고 있습니다. 이른바 교열작업을 도와주고 있는데, 뜻을 알 수 없는 게 많아 고전 중입니다. 낯설고 생소한 단어나 지금은 쓰지 않는 말이 자주 나오는 데다 거두절미하고 이야기하는 1960년대의 특정 상황이나 인명에 어두워 작업이 더딥니다. 우리 사투리나 일본어식 외래어 발음은 이리저리 두드려 맞춰 해독하고 있지만 전혀 땅띔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녹음상태가 안 좋아 못 적거나 잘못 기록한 곳도 많습니다.

골치는 머리나 머릿속의 속어입니다. 그런데 녹취한 글에는 이 말이 머리 두뇌 지혜 등의 의미로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뭘 허겠다는 사람들은 다 골치가 동그스름해요.” “그 사람은 골치가 너무 좋아서” 이런 식입니다. 총명쟁이는 원래 타고난 골치가 좋거나 골치를 잘 쓰는 사람입니다. 재주아치는 재주꾼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데, 재주도 골치와 관계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성품이나 용모에 관한 말로는 질기둥이가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성질이 아주 끈질긴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물론 점잖고 얌전한 사람에게도 불집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일으키거나 위험성이 있는 사물이나 요소가 불집입니다. “멀쩡한 사람을 건드려 불집만 하나 더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쓰입니다. 성질이 나쁜 사람은 흉(凶)업다고 말하더군요. 말이나 행동 따위가 불쾌할 정도로 흉하다는 뜻인데, 흉없다가 아니라 흉업다인 점이 특이합니다.

옥니박이는 옥니가 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입니다. 옥니는 안으로 옥게 난 이입니다. 그러면 옥다는 뭔가? 안쪽으로 조금 오그라진 게 옥은 겁니다. 요즘은 영양상태가 좋은 데다 치아 교정술이 뛰어나 옥니박이는 잘 보기 어렵습니다. 월탄 박종화의 소설 ‘임진왜란’(1954)에는 “무수한 왜적들은 한꺼번에 손발이 옥아 들면서 까맣게 타 죽어 버린다.”는 문장이 있다고 합니다.

바둑용어에는 옥집이라는 게 있습니다. 오그라져 구실을 못하는 집입니다. 집의 모양이긴 하지만 참집이 아니어서 나중에 단수(單手)를 당해 메워지는 곳으로, 모양이 잘록하다 하여 잘록집이라고도 합니다. 옥여서 바싹 죈다는 ‘옥죄다’에도 옥이 나옵니다.

옥다에는 ‘장사 따위에서 본전보다 밑지다.’는 뜻도 있더군요. “재수가 좋으면 이삼 원, 옥아도 칠팔십 전.” 김유정의 소설 ‘금 따는 콩밭’에 나오는 말입니다. 본전, 본밑천도 예전에는 본밑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나 봅니다. “밑져도 본밑”이라고 합니다. 

고수련은 무슨 뜻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지만 참 반가운 말이었습니다. 앓는 사람의 시중을 들어주는 게 고수련인데, 음식을 먹기 전에 조금 떼어 허공에 던지는 고수레와 어원이 같은지 궁금했습니다. 알고 보니 요양원 병원 이름에 고수련이 많았습니다. 소설에도 제법 등장합니다. “이 병이 낫도록 고수련만 잘하면 회복 후 토지를 얼마 주리라는 언약을 앞두고 나의 팔촌형을 임시 양자로 데려온 그것만으로도 평온을 잃은 그의 심사를 알기에 족하리라.”(김유정 ‘형’) “애기 서는 사람 고수련하랴,그 대단한 법관사위 대접하랴 눈코 뜰 새 있을 줄 알아?”(박완서 ‘도시의 흉년’)

함함하다(털이 보드랍고 반지르르하다. 소담하고 탐스럽다)도 좋은 말 같았습니다. “아 군인이 쓱 나오드니만드루 휘휘 둘러보드니만 함함한 여자가 있으니깐 따라가 버렸단 말야.” 이런 표현, 재미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는 데 권세 있는 사람에게 부탁해 그 힘을 빌리는 ‘청(請)질’이라는 말은 요즘 많이 쓰는 갑질과 함께 쌍둥이처럼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밖에 주보(酒甫·술을 몹시 마시거나 즐기는 사람) 속공(屬公·임자가 없는 물건이나 금제품, 장물 따위를 관의 소유로 넘기는 것) 같은 단어도 쓰임새가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문생활이 그동안 격변해왔고 정통 문법과 어법은 계속 파괴되는 상황에서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세대가 쓰던 말은 이제 다 잊히고 사라져가고 있다는 걸 새삼 다시 알게 됐습니다.

이 강연록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알게 된 거지만, 최근에 만난 말 중 가장 좋고 인상적인 것은 ‘글때’입니다. 글을 읽거나 글씨를 쓰는 일이 몸에 밴 게 글때입니다. 나 같은 조고계(操觚界)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말입니다. 조고계는 한자 그대로 풀면 술잔을 잡는 사람들의 사회로, 글을 짓거나 글씨를 쓰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활동 분야, 즉 문필계를 뜻합니다. 이 말로 미루어 보더라도 글과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봅니다.

글때라는 말을 잘 갈무리하면서 글이나 글씨가 더욱더 내 몸에 배기를, 그러나 글이나 글씨에 때가 끼거나 묻지는 않기를 바라게 됩니다. 스스로 점검하고 경계하게 하는 고마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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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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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재 (14.XXX.XXX.49)
좋은 글 잘 읽었읍니다.

글 중 "옥다" 는 말은 "옭다" 와 가려지는 걸까 궁금했읍니다.

거듭 좋은 글 쓰시는분들이 존경스럽고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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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10:2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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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221.XXX.XXX.56)
옭으면 옥게 될 것 같네요. 올가미는 아마도 옭다에서 온 말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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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20:5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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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세상 (112.XXX.XXX.252)
누가 우리말이 모자란다고 했을까요? 배우지 않고, 가르치지 않아 모르고, 익히지 않아 쓰지 못할 뿐인 것을...
이런 말을 알면, 새로운 외래어가 들어올 때, 우리가 쓸 말을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소개하지 않은 말, 다음 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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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08: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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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221.XXX.XXX.56)
글에도 썼지만 아버지세대의 말이 잊히고 버려지는 게 안타깝습니다. 내 아들세대도 나중엔 내 세대의 말을 잘 모를 테고. 아니 벌써 모르고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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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20: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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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백 (39.XXX.XXX.247)
고슴도치도 제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군요.
항상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조고계 모임같은 게 있으면 말석에라도 앉아서 고기도 굽고, 술 한잔 따르고 싶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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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07: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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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221.XXX.XXX.56)
조고계는 어느 신문의 창간호 1면에서 읽은 적 있습니다. 요즘 세상엔 좀 어려운 말이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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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20: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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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 (122.XXX.XXX.14)
좋은 우리말 잘 배웠습니다.
글때, 고수련, 함함하다 다 정감이 있는 말입니다.
조고계도 처음 듣는 말입니다.
얼마 전 <나비물>이라는 단어도 자유칼럼을 읽으며 배웠는데 추억이 살아나는 정겨움이 있었습니다.

삼복더위 건강하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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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6 11:3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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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221.XXX.XXX.118)
감사합니다. 이 복더위에 저는 서예전 했어요. 단체전이지만 공들여야 하는 건 마찬가지인 듯. 내일 종료. 손자들과 힘께 늘 즐겁게 생활하시는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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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00: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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