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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연필
박종진 2020년 04월 08일 (수) 00:08:11

헝클어진 은발(銀髮), 둥글다고 할 수 없는 각진 얼굴에 단단하게 다문 입과 힘차게 솟은 코, 턱을 당기고 눈에 힘을 주어 정면을 강렬하게 응시하는 그림은 1820년 그려진 베토벤의 초상화입니다. 저는 이 초상화를 볼 때마다 솟아나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그림에 보이는 연필 때문입니다. 바흐, 모차르트, 하이든 심지어 베토벤의 다른 초상화에도 연필이 등장하는 초상화는 없는데 말입니다. 베토벤은 연필을 좋아했을까요? 아니면 그냥 오브제였을까요? 제 개인 생각으론 왼손에 들고 있는 악보엔 하얀 깃펜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합니다만. 하여튼 이상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아주 로맨틱한 일과 관련 있는 일지도 모릅니다.

 
요셉 칼 슈티일러(Joseph Karl Stieler)가 1820년에 그린 베토벤의 초상화 <출처: 위키디피아>
 

베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독일 본에서 태어났습니다. 베토벤은 3형제 중 장남. 산수는 덧셈과 뺄셈까지. 곱셈은 못 했다고 합니다. 왼손잡이였지만 글씨는 오른손으로 썼고 천재는 악필이라는 것을 그를 조사하여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엄청난 음악적 재능은 그의 고향에서는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13세에 궁정 차석 오르가니스트가 되어 적은 돈이나마 연봉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 해 두 해 세월이 지남에 따라 태어난 고향은 그의 엄청난 재능을 펼치기에는 너무 좁았습니다. 1792년 11월 베토벤은 본을 떠나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갑니다.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에게 음악수업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낯설고 새로운 곳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해 12월엔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망과 고아가 된 두 동생까지. 베토벤에겐 격랑의 세월이었습니다.

유럽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혁명의 와중인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였고 이듬해인 1793년엔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에 전쟁을 선언하였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물자 조달이 어려워졌습니다. 혁명, 전쟁, 교육, 그리고 생업에 꼭 필요한 이 이야기의 다른 주인공인 연필은 큰 문제였습니다. 유일한 고급품인 영국산 연필은 물론 유황이 섞인 심이 꽂힌, 질이 떨어지는 연필조차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부드럽고 진하게 써지는 고급 흑연은 영국에서만 산출되었고, 그것도 덩어리라야 쓸모 있었습니다. 커다란 덩어리를 톱으로 얇게 켜 판으로 만들고 다시 자를 대고 칼로 잘라 사각 기둥의 연필심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들고 남은 자투리 흑연과 불순물이 많아 거친 것들은 가루로 내어 유황, 밀랍 등을 섞어 만든 것이 저급품이었습니다. 오늘날 연필심이 원통인 것은 흑연 가루와 점토를 섞어 반죽하고 소면 국수를 뽑듯 가락을 만들어 용광로에서 구웠기 때문입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1794년 연필 제조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재 방법이 프랑스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오스트리아에서도 이 방법으로 만들어진 연필이 나왔습니다. 베토벤은 알고 있었을까요?

베토벤은 바빴습니다. 하이든의 소개로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라는 새로운 스승을 만났고 작곡가로서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 만큼 되었을 때 그는 연주 여행길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약 4개월 동안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돌고 왔는데, 며칠 뒤부터 베토벤은 심하게 앓았습니다. 다행이 회복했지만, 청력엔 이상이 생겼습니다. 1796년 6월 그의 나이 26세였습니다. 이후 약 2년 동안은 그의 인생에서 과도기였습니다. 피아니스트의 삶을 포기하고 작곡가로, 그의 작곡 습관도 틀이 잡히고 있었습니다. 베토벤은 몇 시간씩 산책을 하며 떠오르는 생각을 노트에 연필로 메모하고 스케치북에 옮겨 적는 방법을 썼습니다. 이 점 때문에 베토벤이 초상화에서 연필을 잡게 된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쉽게도 아래 일화를 보면 베토벤은 필기구에 애정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늘 그렇듯 필기구들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다. 잉크가 바싹 말라버린 깃펜 한 움큼과 숙박업소용으로나 어울림직한 펜들이 나뒹굴었다.-<출처: 베토벤 (얀 카이에르스 지음/홍은정 옮김,도서출판 길)>

여기서 어울림직한 펜들은 연필입니다.(앞서 나온 깃펜 말고 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당시에 연필밖에 없었습니다.) 필기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저렇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수수께끼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답은 세상 모든 문제의 만능열쇠인 사랑이었습니다. 베토벤의 편지 중 유명한 것은 귓병이 나을 수 없음을 깨닫고 두 쪽의 편지를 작성하고 평생 간직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遺書)와 그가 죽은 후 발견된 수취인 불명의 발송되지 않은 세 통의 이른바 불멸의 연인에 관한 편지입니다. 베토벤은 수많은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불멸의 연인 후보에 오른 여인만 10여 명이 될 정도였고 1994년엔 <불멸의 연인>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편지는 1812년 7월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편지의 첫 부분을 보면 우리는 아마도 이 연필에 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래는 편지입니다.

-7월6일 아침에

나의 천사, 나의 모든 것, 나의 분신 오늘은 오직 몇 마디만, 그것도 당신의 연필로 -
당신의 연필 ,베토벤이 편지를 쓸 때 사용된 연필은 원래 불멸의 연인의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멸의 연인에 관한 편지
 

베토벤은 로맨티스트였나 봅니다. 부치지 못한 편지를 죽을 때까지 갖고 있었고, 제 추측이 맞는다면 연인에게서 받은 연필을 초상화의 모델이 되면서까지 들고 있었으니까요. 어쩌면 베토벤이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둘만 아는 신호였을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초상화의 베토벤과 연필을 번갈아 봤더니 그의 인상은 한결 부드럽게 보였습니다. 올해는 베토벤 탄생 250년, 연필을 통해 베토벤의 사랑과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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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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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비미중년 (164.XXX.XXX.146)
뭐에 홀린듯 스테들러 노랑-검정 지우개 달린 연필 두다스를 영입 했는데 아직 한자루도 깍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서랍안에 두고 잊고 있었는데 만년필의 사각임과는 다른 연필의 사각임도 간만에 느껴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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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9 13: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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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75.XXX.XXX.83)
저도 그 연필 좋아합니다. 연필은 그냥 갖고 만 있어도 좋습니다. 장전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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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0 07:5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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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abba (58.XXX.XXX.32)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몰랐던 사실을 덕분에 알아 베어토벤의 초상화를 다시 한번 보게 하고 남다른 잔잔한 단상을 느끼게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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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3 09: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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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175.XXX.XXX.119)
흥미롭게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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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3 17: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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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abba (58.XXX.XXX.32)
아주 흥미로베 읽었습니다~ 베어토벤의 초상화를 다시 한번 보게 하고 남다른 잔잔한 단상을 느끼게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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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3 09: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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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223.XXX.XXX.59)
베토벤 소개에 자주 등장하는 그림이었는데, 새롭네요!!
늘 흥미로운 글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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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8 14:3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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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이번에 베토벤의 음악을 다시 들었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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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8 17: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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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아 (121.XXX.XXX.123)
2일 저녁에 택시를 탔는데, 잔잔한 음악이 흐르더군요. 네 명 중 누군가가 "아저씨, 교회 다니세요? 찬송가가 참 듣기 좋네요" 했어요. 저도 속으로 '찬송가라 이리 편안하구나'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택시기사님 왈 "이거 베토벤이에요. 오늘밤 내내 '불멸의 베토벤'이라는 테마로 베토벤의 유명 작품부터 숨겨진 명곡, 변주곡, 편곡 작품과 연주자들의 렉처 콘서트까지 모든 것을 들려준다고 해서 듣고 있어요." ㅎㅎㅎㅎ 다음 상황은 말 안 해도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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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8 11: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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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211.XXX.XXX.243)
저도 이 방송을 들었습니다. 오늘 올린 글을 쓰기 위해 교보문고에서 책을 몇 권 사고 우연하게 라디오를 틀었는데 흘러 나왔습니다. 아주 잠깐 우주가 도와 준다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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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8 17: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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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110.XXX.XXX.123)
그날 17시간 베토벤 음악 방송했을 것임. 창사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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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8 16:04:10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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