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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블루베리 농부입니다<2>
인연으로 영그는 과일
함인희 2021년 09월 17일 (금) 00:27:41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값진 인연이구나.“
저희 농장의 상표 이름은 ‘닥터한 블루베리’입니다. 내년이면 팔순을 맞이하는 주인장(저의 이모님입니다)께서 당신 환갑을 앞두고 진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은 걸 기억하며 지은 이름입니다. 의사도 아니면서 닥터를 붙였다고 딴지를 건 주인장 친구 분이 계셨구요. 가끔 사정 모르는 이들이 닥터함을 잘못 쓴 것 아니냐 조심스레 묻기도 합니다.

지난 10년간 저희 블루베리 단골은 주로 주인장의 동창생, 은퇴 전 직장 동료, 친척들이었습니다. 저도 믿을 만한 동료들과 만만한 제자들에게 권유 겸 강매를 했습지요. 이리저리 안면이 있는 분들 위주로 판매를 하다 보니, 포장할 때마다 받는 분들 얼굴이 아른거려 살짝 부담되기도 했지만, ‘우리 블루베리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값진 인연이구나’ 싶은 순간이 더욱 많았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1kg에 3만 원짜리 값비싼 과일을 아무에게나 권유하긴 어렵습니다. 출하 첫해엔 주인장 얼굴 봐서 한 번 정도는 사주어야지 선심 쓴 분들이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만일 그런 선심에만 의지했더라면 10년을 한결같이 버티긴 어려웠을 테지요. 나름 충실한 단골을 확보하기 위한 저희만의 전략(?)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저희 단골이 된 분들 중엔 연금을 타시는 분들이 꽤 됩니다. 이분들은 당신 것에 더해 아들 딸 손자들과 나누려고 넉넉하게 주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들네 딸네 주소를 일일이 적어 보내주는 손길에서 할머니의 푸근하고 따스한 마음이 느껴지곤 합니다.

그런가 하면 최근 백내장 수술을 받은 분들이나 눈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분들도 저희의 빼놓을 수 없는 단골들입니다. 이분들은 생블루베리 철이 돌아오면 1년간 먹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양을 주문하곤 합니다. “미국산이나 칠레산 수입 생블루베리는 어떤 처리를 하고 들여오는지 도무지 믿을 수 없으니. 믿을 만한 생과(生果) 살 수 있을 때 사서 냉동실에 쟁여두겠다”시면서 말입니다.

실은 저도 블루베리를 먹기 시작한 지 3년쯤 지나자 눈의 피로감이 확연히 사라졌습니다. 예전엔 컴퓨터 앞에 앉아 1시간 정도 지나면 모니터나 책글씨가 여러 개로 겹쳐 보이거나 아예 보이질 않아 반드시 쉬어야 했는데, 지금은 조금 과장해서 하루 종일 모니터를 보아도 눈이 맑고 쌩쌩합니다. 덕분에 장롱면허 35년차인 저는 전철 안이든 조치원행 기차 안이든 소설책에 코를 박곤 한답니다.

뜻밖의 단골들도 있는데요. 저희 농장 가까이 거주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그 주인공입니다. 러시아 출신 건설 노동자는 러시아에선 블루베리가 정력강장제로 알려져 있다는 이야길 들려주었고, 실내 전기설비 기술자라는 중국 동포 아줌마는 ‘블루베리의 19금 효능’과 관련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했습지요. 외국인 노동자들은 현장 따라 떠돌이 생활을 하기에 단골이 되긴 힘들지만, 중국 동포 아줌마는 올해도 저희 블루베리를 주문했네요.

저희가 가장 좋아하는 단골은 저희 것을 선물로 돌리는 분들입니다. 주인장의 사위가 근무하는 작은 건축사무소는 서너 해 전부터 7월 초 창립기념일을 기해 직원 및 신세진 분들에게 블루베리를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장님 왈, “그동안은 선물 잘 받았다는 인사를 받은 적이 없는데 블루베리를 돌리고서부터는 인사를 많이 받고 있다”시네요. 특별히 직원들 배송지 주소가 전남 해남 순천, 충남 당진 등지인 걸 보면 부모님께 보내드리는 효자 효녀가 많은 듯합니다.

해마다 목사님, 신부님, 스님께 살뜰히 블루베리를 챙겨드리는 신실한 신자도 여럿 있구요, 스승이나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안부 인사 겸 선물을 보내는 단골들 리스트도 조금씩 길어지고 있네요. 전주 인근에서 외부와 일절 인연을 끊고 수도생활에 전념하는 수녀님께 해마다 블루베리를 보내드리던 분이 있었는데, 작년에 수녀원 땅이 수용되면서 어디로 옮기셨는지 몰라 올해는 마음만 보내드렸던 안타까운 사연도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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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미 에모리대대학원 사회학 박사. 이화여대 사회과학대학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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