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검색어 : 자유칼럼, 에세이
> 연재칼럼 | 함인희 엽서한장
     
블루베리 끝물을 정리하며
함인희 2022년 08월 23일 (화) 00:02:44

올해 저희 블루베리 농장에서는 지난달인 7월 15일 배송을 마감하고, 닷새 후인 20일 로컬 푸드 출하도 끝냈습니다. 블루베리 수확 기간이 최근 10년 사이 무려 3주 이상 빨라졌으니, 기후 변화의 위력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블루베리는 참으로 예민한 과일이라 배송 과정에서 혹 무르진 않을까, 행여 터지면 어쩌나 늘 마음 졸이게 됩니다. 습도가 높아지면 결로(結露)현상까지 나타나 고객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하고 원성을 듣기도 하니까요. 재고(在庫)없이 반품(返品)없이 한 해 수확을 마무리하고 나면 룰루랄라 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답니다. 이제부터 끝물 정리가 시작되니까요.

끝물 정리는 지루하기도 하거니와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랍니다. 한창 수확기엔 알바를 구할 수도 있고 일손의 도움을 청할 수도 있지만, 끝물 정리는 누군가에게 부탁하기엔 쪽 팔리는(?) 일인 데다, 기꺼이 하고 싶다고 손 드는 사람도 없기에, 오롯이 주인 어깨 위에 떨어진 숙제인 셈이지요.

무엇보다 끝물 열매는 빛깔부터 초라하게 바뀝니다. 아침 햇살에 영롱하게 반짝이던 블루베리 특유의 보랏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뽀얗게 덮여 있던 분(粉)까지 깨진 채 희미하게 바랜 빛깔의 열매가 듬성듬성 눈앞에 나타납니다. 끝물은 열매의 크기도 대체로 볼품이 없습니다. 주인 몰래 뒤늦게 맺힌 열매들이 나중에 익어서 속을 썩이는 겁니다. 과일은 같은 종자 중엔 클수록 맛이 좋다는 복숭아 농장주인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볼품없이 작은 끝물 블루베리는, 보기만 해도 어금니에 침이 고이던 새콤달콤한 맛은 물론 한입 깨무는 순간의 탱글탱글한 식감도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끝물을 정리하노라면 지난겨울 가지치기할 때부터 올봄 꽃눈 따주기를 거쳐 열매 솎아주기할 때, 제때 제대로 끝맺지 못했던 작업의 결과물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뿌리가 얕게 벋어나가는 게 특징인 블루베리는 7~8개 정도 굵은 가지를 남기고 나머지 새로 올라오는 가지나 오래 묵은 가지는 과감하게 잘라내야 합니다. 한데 막상 가지치기를 할 때면 아까운 마음에 ‘올해만 열매를 따먹자꾸나’ 하고 남겨두게 됩니다. 묵은 가지일수록 영락없이 크기도 작고 맛도 시큼한 열매를 늦게까지 달곤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안쪽으로 난 가지들도 가차 없이 잘라내야 하는데 미련이 있어 남겨두면, 햇볕도 안 들고 통풍도 안 되어 열매들이 늦게 익는 데다 쉽게 곯기도 합니다. 열매를 수확할 때 무성한 이파리 뒤에 숨는 바람에 눈에 안 띄어 놓쳐버리기도 합니다.

블루베리는 꽃눈 한 개에 열 송이 가까운 열매가 열립니다. 그러니 가지마다 꽃눈을 2~3개만 남기고 모조리 따주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지만 또 냉해를 입으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 꽃눈을 3개 이상 남기다 보면 수확기에 후회막급이지요. 이미 버스는 떠나갔지만, 잘못을 만회할 기회가 한 번 더 옵니다. 과일 농장에서 필수 중 필수 작업인 과일 솎아주기가 바로 그 기회죠. 송이가 너무 많이 열렸다 싶으면 송이째 솎아주고, 한 송이 안에서도 유독 작은 열매가 보이면 한 알씩 솎아주고, 뒤늦게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경우도 깨끗이 따주어야 합니다. 한데 열매 솎아주기는 너무 많은 시간과 엄청난 인내를 요하는 작업이기에, 꾀가 나서 적당히 게으름을 부리고 나면 끝물 작업 때 여간 고생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끝물을 정리하노라면,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람이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마지막 모습은 비슷한 면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끝물처럼 인생의 수확기가 끝날 즈음이면 그때 왜 과감히 상황을 정리하지 못했을까, 그때 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 그때 왜 바보처럼 게으름을 부렸을까, 아쉽고 안타깝고 후회스럽고 한스러운 것들이 새록새록 생각나니 말입니다.

지난주 목요일엔 이화여대에서 정년퇴임하는 교수님들을 위한 환송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날도 두 분 교수님이 무대에 올라 후배 교수들에게 퇴임 인사를 했습니다. 한데 정말 신기한 건, 3분가량의 퇴임 인사를 하는 동안 30여 년 봉직했던 교수생활이 압축적으로 전달되곤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때마다 왠지 모를 숙연함에 때론 경건함마저 느끼게 됩니다. 제 인생의 끝물 또한 어찌 정리해야 좋을지 지금부터 찬찬히 돌아보고 나름의 ‘뿌듯한’ 마무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모양입니다.^^

자유칼럼의 글은 어디에도 발표되지 않은 필자의 창작물입니다.
자유칼럼을 필자와 자유칼럼그룹의 동의 없이 매체에 전재하거나, 영리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 자유칼럼(http://www.freecolum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칼럼의견쓰기(0개)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다음에 해당하는 게시물 댓글 등은 회원의 사전 동의 없이 임시게시 중단, 수정, 삭제, 이동 또는 등록 거부 등 관련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운영원칙]

  • 욕설 및 비방, 인신공격으로 불쾌감 및 모욕을 주거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하거나 불법정보 유출과 관련된 글
  • 다른 회원 또는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및 개인정보 유출
  •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하는 경우
  • 불법복제 또는 해킹을 조장하는 내용
  • 영리 목적의 광고나 사이트 홍보
  • 범죄와 결부된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내용
  • 지역감정이나 파벌 조성, 일방적 종교 홍보
  • 기타 관계 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