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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기 한 지식인의 비운의 삶
권오숙 2022년 08월 25일 (목) 00:00:59

최근 '셰익스피어 번역 100년사'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 연구 과정 속에서 너무도 안타까운 한 지식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국내 최초로 셰익스피어 영어 원전을 바탕으로 『햄릿』을 번역한 영문학자 설정식(薛貞植·1912~1953)입니다. 물론 희곡 형태의 완역본인 현철의 『하믈레트』가 1923년에 이미 출간되었지만, 이 번역은 영어 원본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츠보우치 쇼요(坪内逍遥, 1859~1935)의 일본어 번역본을 재번역한 것입니다. 설정식은 미국 오하이오 주 마운트 유니언 대학(Mount Union College)에서 2년간 영문학을 전공했고, 이후 컬럼비아 대학에서 셰익스피어를 전공했습니다.

요동치는 해방정치에서 미국 유학파 설정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해방 직후인 1945년에는 미 군정청에 들어가 공보처 여론국장으로 재직하였습니다. 그런데 재직 기간 중인 1946년 9월에 임화, 김남천 등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947년에는 좌익 문학 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 외국문학부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에 입대했다가 철수하는 인민군과 함께 월북했습니다. 그 후 그는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진행된 개성 휴전회담에 조중(朝中)대표단의 영어통역관으로 등장했습니다. 이런 그의 행보 때문에 남한에서 그는 월북 작가로 분류되어 모든 작품이 판매 금지되었다가 1988년에야 해금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53년에 북한에서 행해졌던 남로당계 숙청 과정에서 그는 「인민공화국 정권전복음모, 반국가적 간첩테러 선동행위」 혐의로 박헌영, 임화 등과 함께 41세의 젊은 나이에 처형당했습니다.

30대의 설정식

미국에 유학을 다녀온 뒤 미 군정청에 근무하던 사람이 좌익문인으로 활동하고 북한군에 입대했다가 월북하여 휴전 회담에서 북측의 통역을 담당한 모순된 그의 인생 행보는 그동안 많은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를 “회색분자”라고 칭한 자도 있었고, “(해방공간의) 문제적 개인”이라 평한 평론가도 있습니다. 그런데 휴전회담 현장에서 그를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티보 머레이(Tibor Meray)라는 헝가리 종군기자의 회고록에 의하면 설정식은 한국을 미군기지 이상으로 대하지 않고 이승만 파시즘 정권을 지지하는 데 대한 불만으로 미국에 등을 돌리고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모순된 행보는 단순히 회색분자나 기회주의자라기보다는 현실 비판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인의 행보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설정식은 해방 후 1946년부터 1950년까지 단 4년간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했습니다. 이 짧은 기간에 세 편의 시집과 두 편의 장편소설, 두 편의 단편 소설 등을 발표하였습니다. 해금 후 이루어진 그의 문학에 대한 연구에서 그는 현실을 비판하는 사실주의자이면서도 모더니즘 미학을 추구한 작가라는 평을 받습니다. 그의 인생 행보만큼이나 문학적 성향도 모순적입니다.

설정식의 『하므렡』은 1949년 9월 30일 백양당(白楊堂)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이 번역본은 정통 영문학자가 셰익스피어 원전을 바탕으로 완역을 한 최초의 『햄릿』 번역본이라는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설정식은 『하므렡』 번역에서 본문 앞에 서문(序文)을 달아 영어 저본과 번역에 참조한 여러 일본어 번역본을 모두 밝히고, 자신이 사용한 번역 전략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뒤에는 셰익스피어와 작품에 대한 해설을 덧붙였습니다. 드디어 우리 번역 문단에 영문학 전공자의 序, 번역 본문, 작품 해설의 형식을 온전히 갖춘 번역서가 등장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자의 이해를 위해 필요하면 원전에 없는 무대지문을 추가하고, 각주를 통해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말장난이나 유음 반복 같은 셰익스피어 극이 지닌 독특한 미학적 특징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토착적 표현들을 상당히 많이 동원하여 번역하였습니다. 그의 번역을 한 줄 한 줄 뜯어보면서 참 정성어린 번역이라 생각하였습니다. 1940년대의 번역가인 설정식의 이런 진지한 번역태도는 필자를 비롯한 현대의 번역가들에게 창의성과 성실성 양면에서 좋은 귀감이 될 만합니다.

해방 후 혼란스러웠던 좌우 대치 정국에 끼여 비극적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국내 영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하는 학자이자 번역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 비평가는 해방 후 시, 소설, 평론, 번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학 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그가 해방기의 대표적 시인으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지식과 권력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지식이 권력의 시녀가 되는 일들이 인류 역사상 늘 반복되는 일이지만, 우리는 쉽게 그런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데 그칩니다. 정작 그런 처지에 빠진 지식인의 실존적 고뇌와 갈등에 대해서는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우울한 폭우와 폭염에 시달리며 수행한 번역사 연구를 통해 만나게 된 한 지식인의 비극적 삶에 숙연해지는 8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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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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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들 (61.XXX.XXX.41)
글을 읽으니 황현의 절명시 구절이 떠오릅니다. 배운 사람으로 산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물론 학력은 높아도 하등동물처럼 먹이만 좇아 사는 사람도 부지기수이지만요.

슬프지만 알아야 할 이야기를 해 주셔서 깊이 감사합니다.
벌써 다음 글이 기다려집니다.
오래 건강하시어 좋은 글 많이 써 주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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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6 07: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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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은순 (211.XXX.XXX.103)
선생님 안녕하세요?
다른 글들도 다 재밌고 유익하였지만, 오늘 우리 역사상 묻혀 있던 영문학자이자 번역가, 시인이었던 한 지식인을 소개해 주신 글,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동안 책을 너무 멀리하고 살았는데, 선생님의 글을 읽고, 그리고 선생님이 번역하신 작품명을 읽고는, 갑자기, 셰익스피어 소설과 희곡 등을 다시 정독하고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꼭 실천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답변달기
2022-08-25 11:2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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