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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된 엄마
배정원 2008년 05월 07일 (수) 08:07:37
오래 전부터 엄마 옷 한 벌 사드려야지 마음먹었습니다.
아이들 옷은 때도 없이 사주면서 부모님 옷 한 벌 사드리기를 마음먹고 해야 한다는 것 또한 부끄러운 일이나,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드디어 엄마에게 전화를 드려서는 백화점에서 만났습니다.
엄마는 “그래 좋은 옷 한 벌 사주렴” 해도 될 것을 계속 백화점에 왜 왔는지 모르는 척하십니다.
엄마 옷 한 벌 고르기가 참 힘이 들더군요.
이제 정말 연세가 많아지셔서 맞는 옷 고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자주 사드렸으면 수월하게 옷을 골랐을 텐데, 새삼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엄마가 한사코 입겠다고 하셨던 옷은 너무 점잖은 옷이었습니다.
늘 그렇게 똑 떨어진 옷만 입고 사셨지요.
그런데 전 정말 여자들이 좋아할 그런 옷을 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엄마가 아니고, 여자가 좋아할 옷 말이죠..
그래서 좀 화려하다 싶은 옷, 색깔이 예쁜 옷, 꽃 무늬가 그려진 아기자기한 옷을 저는 골랐고, 엄마가 골라 드시는 옷은 정말 일반적인 점잖은 할머니 옷이었습니다.
그렇게 이게 좋다 거니 저게 마음에 든다 거니 옥신각신하며 몇 가게를 돌았습니다.

그러다 엄마 옷 고르는 막간을 이용하여 내 옷 한 번 사 볼까 하고 좀 젊은 사람이 입을 원피스를 파는 가게에 들어섰습니다.
빨간 원피스를 한번 입어 보겠다며 옷을 바꿔 입고 나온 사이 엄마가 골라 들고 계신 옷은 보라색 실크 원피스였습니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목 주위로는 레이스 주름이 달리고, 밑으로 퍼진 원피스는 엄마가 입으시기엔 좀 너무 젊은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보라색을 참 좋아하시거든요.

그런데 엄마는 마음에 드시는 듯,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나오셨습니다.
“엄마, 예쁘긴 한데 입으실 수 있겠어요”라고 말 하려는 데, 그 옷을 입고 거울을 보는 엄마 얼굴이 참 행복해 보였습니다.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정말 예쁜 옷을 설레며 입어 보는 아가씨처럼 그런 표정으로 엄마는 “어떠니”라고 내게 물어 오셨습니다. 그런 엄마의 모습위로 아카시아 하얀 꽃잎이 마구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으음. 괜찮은데요” 할 수밖에 없는 그때, 우연히 옆에 서있던 엄마 연세의 여성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참 예쁘시네요”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원피스만으로는 도저히 입고 다니시라고 할 수 없어서(소매가 너무 짧았으므로) 작은 연 보라색 니트 스웨터까지 갖추어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 보라색 원피스와 짤막한 연보라 색 니트 스웨터를 입으신 엄마는 정말 마음에 드신 듯 행복해 보이셨죠.
여러 번 거울보고 또 보고...
좀 난감해 하는 내 표정과 전혀 관계없이 엄마는 '앞태와 뒤태'를 보고 또 보십니다.
결국 그 옷은 엄마 옷이 됐습니다.
그 옷 한 벌에 엄마는 소녀가 되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 엄마는 여자고, 소녀였던 사람이었구나. 엄마의 속 마음은 저런 소녀 같은 예쁜 색깔의 낭만적인 원피스를 입고 싶으셨구나."

엄마는 친구분들 만나러 가실 때 그 옷을 입으시겠다고 합니다.
엄마 친구 분들이 어떻게 말씀하실지 궁금해집니다.
“너 주책이야” 하실지, “정말 예쁘구나, 어디서 샀니.. 나도 그런 옷 한번 사 입어야지” 하실지.
엄마는 어떤 표정이실지...

엄마는 그 옷을 사시고는 내내 기분이 좋으십니다, 살짝 들뜬 것같이 목소리도 높아지셨습니다.
돌아오는 길, 아버지의 색깔 고운 셔츠를 한 벌 삽니다. 그에 맞추어서 베이지 색 점퍼도 한 벌 삽니다.
늘 맵시 좋은 정장 차림이셨던 아버지는 요즈음 편하다고 하시며 점퍼를 즐겨 입으십니다.
아버지의 색깔고운 셔츠는 역시 환한 보라색입니다.
아마도 평생 처음으로 두 분이 색깔 맞춰 ‘커플 룩’을 입으실 겁니다.
두 분이 나란히 걸으시는 모습이 빨리 보고 싶습니다.

필자 배정원은 성교육상담전문가이며, 현재 행복한성문화센터소장이다. 일간지를 비롯해 온라인 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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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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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 (211.XXX.XXX.129)
어머니의 처녀시절이 절로 생각납니다. 아래 대목이 특히 좋습니다.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정말 예쁜 옷을 설레며 입어 보는 아가씨처럼 그런 표정으로 엄마는 “어떠니”라고 내게 물어 오셨습니다. 그런 엄마의 모습 위로 아카시아 하얀 꽃잎이 마구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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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7 09:2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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