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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를 추모하며
김영환 2022년 09월 20일 (화) 00:10:26

냉전을 종식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8월 30일 91세로 작고했습니다. 최대의 수혜국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는 “한 명의 정치인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보여줬다”라며 추모했습니다. 빈농의 아들이었던 그는 서기장들이 급서하면서 예상보다 빨리 1985년 3월 54세로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올랐습니다.

냉전 종식 전 한국에게 소련은 공포의 대상이었죠. 스탈린은 1949년 3월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처음 청취하고 다음 해 4월 승인했습니다.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한국과 타이완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라고 망언해 6·25남침 야욕을 북돋웠죠. 수백만 명을 살상한 6·25 전범 스탈린이 1953년 3월 5일 죽자 한국은 제한 송전을 풀어 자축했습니다.

 

(좌) 1991년 4월 19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방한 환영 만찬회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악수하는 모습. 부인 라이사 여사가 박수치고 있다. (대한뉴스 화면 캡처)
(우) 서베를린 시민들이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 붕괴 후 공랭식 트라반트 차를 타고 서베를린으로 들어오는 동독시민들을 박수로 환영하고 있다. (필자 촬영)

1983년 9월 뉴욕발 김포행 KAL 007편기는 캄차카 상공을 날던 중 소련 전투기 조종사가 쏜 미사일에 격추돼 승객과 승무원 등 16개국 탑승자 269명 전원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세계가 경악한 참극은 안드로포프 서기장 때였습니다. 소련 정치국은 여객기 격추를 어떻게 정당화할지 논의했고 항로를 벗어나 첩보 임무를 수행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농업담당 서기였습니다.

체르넨코가 1년여 만에 사망해 권좌에 오른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핼리 혜성을 따라, 금성에서 인공위성으로 관찰해도 가전제품은 저질이고 달에 우주선을 보내도 슈퍼엔 우유와 달걀이 없다”, “언론은 나를 비롯해 무엇이든 비판해도 좋다"…. 외신부 기자 시절 기억에 어렴풋한 고르바초프의 말입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의 등장이죠.

   
  (좌) 베를린장벽 곁에서 기념품을 고르는 관광객들. (필자 촬영) 
(우) 1990년 3월 18일 실시된 동독 최초이자 마지막 자유 총선거에서는 서독의 기민당(CDU), 사민당(SPD)도 후보를 냈다. (필자 촬영)
 

1991년 4월 소련 대통령의 역사적인 제주 정상회담 때 나는 파리에 있었기 때문에 국립영화제작소의 14분짜리 동영상을 보며 고르바초프가 얼마나 세상을 바꿔놓았나 실감했습니다. 그는 늘 웃었고 따스해 보였습니다. 모든 걸 의논했다는 평생 동지였던 모스크바대 철학과 출신의 캠퍼스 커플인 라이사 여사도 그랬습니다. 한국과 소련은 1990년 6월 샌프란시스코, 1990년 12월 크렘린 회담을 포함해 3차례 정상회담을 했죠. 88올림픽에는 대규모 소련 선수단이 참가해 동서 화합의 장을 열었습니다. 조선 말에 끊어진 국교도 다시 수립했습니다.

동유럽의 민의를 존중한 그는 불개입 정책으로 헝가리, 체코, 폴란드의 민주화를 도왔습니다.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 동독에 33만 명이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은 간섭하지 않았고 이듬해 봄 동독 의회는 서독과의 합병을 결의해 통독이 이루어졌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철군, 핵무기 감축은 평화 지향과 함께 자원 배분을 국내로 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장벽이 붕괴될 때 베를린에 있었던 나는 바이스체커 서독 대통령의 동선을 따라 <통일의 다리>란 이름으로 정중앙이 국경선인 분단의 다리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를 목말 태우고 걷던 중년 남자에게 물었죠.
"가슴에 단 배지는 무엇입니까?"
"고르비(고르바초프의 애칭)입니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습니다. 다른 많은 시민이 그 배지를 달고 있었습니다.

1990년 11월 파리에서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34개 가맹국은 냉전 종식을 선언했습니다. 이 회의장에서 고르바초프를 봤습니다. 젊은 시절 수없이 서유럽을 방문했던 그는 동유럽에서 공산주의를 무너트렸습니다. 종주국 소련도 1991년 12월 25일 해체됐습니다. 본인도 공산주의자에서 민주사회주의자로 변모했습니다. 그는 동유럽인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인생을 관리하는 권리’, 불확실성과 리스크를 동반한 선물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나는 급변하는 소련의 취재 비자를 받으려 노력했지만, 하부에는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듯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간선제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는 정치 기반이 약해 1991년 8월 ‘삼일천하’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암살 기도도 있었습니다. 그는 원조받아 경제를 일으키려고 서방에 SOS를 쳤죠. 컬러 텔레비전은커녕 텅빈 식료품점엔 먹을 게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1991년 12월 소련 최고회의의 선언으로 소련 공화국들의 독립이 인정되고 독립국가연합(CIS)이 수립되자 소련과 대통령직이 사라진 고르바초프는 핵무기 발사 시스템 등 전권을, 그해 6월 직선제로 선출된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게 인계하고 떠났습니다.

1989년 12월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몰타 정상회담을 열었고 199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냉전 종식, 중거리 핵전력 전폐 조약 조인, 페레스트로이카에 의한 공산권의 민주화가 공적이었습니다. 세계는 '역사의 종언'이라며 희망에 찬 듯 보였습니다.

냉전을 평화리에 종식하고 위성국에 독립과 평화를 가져온 그는 유럽에서 20세기 최고의 정치인으로 평가받지만, 러시아에선 아니었죠. 2017년 러시아 레바다 첸트르의 여론조사에서 46%가 고르바초프에게 부정적이었고, 30%는 무관심, 15%만이 긍정적이었습니다. 약 80%가 소련 붕괴를 애석해했고 그 이유로 경제 붕괴(53%), 강대한 국력 상실(43%)을 들었습니다. 그는 1996년 직선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0.51%만 얻었습니다. 흐루쇼프와 고르바초프의 전기를 저술한 윌리엄 타우브만 미 에머스트 칼리지 교수는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근대화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를 구축하려고 한 개혁자로서 조국과 세계를 바꿀 선견지명이 있었지만, 그가 바란 정도로 변화시키지 못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베를린장벽 곁에서 부서진 장벽 조각들을 팔고 있는 노점상. (필자 촬영)

그에게 많은 어록이 있죠. “세상은 독재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The world will not accept dictatorship or domination.)" 2016년 10월 1일 국군의날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북한 김정은 정권에 대해 '늦게 오는 자는 역사가 처벌할 것이라는 말이 있다'고 연설했습니다. 1989년 10월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고르바초프는 키스하는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에게 “삶에 대처하지 않는 사람에겐 위험이 기다린다.(I believe that danger awaits only those that do not react to life)"라고 경고했는데 흔히 “너무 늦게 오는 자는 삶이 처벌한다.(He who comes too late is punished by life)”로 잘못 인용된다고 <www.newworldencyclopedia.org>는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간 게 “‘역사가 처벌한다’가 아닐까. 여러 언어로 바뀌면서 와전이 있겠지만 그렇게 해석해야 고르바초프 말답지 않나”라고 생각합니다.

고르바초프는 1998년 외손녀 아나스타샤 비르간스카야와 함께 크렘린이 보이는 피자헛 광고에 나옵니다. 사람들이 그의 옆에서 비판과 지지의 말을 주고받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자유와 기회를 주었다”, “정치 경제적 혼란을 주었다”고 설왕설래하다가 마지막엔 노부인이 나서 “그 덕분에 피자를 먹는다”고 하자 모두 “고르바초프 만세! (Hail to Gorbachev!)"를 외칩니다. 여러 CF출연료는 자신의 재단을 비롯해 환경보호 등 공익단체에 기부했죠.

소련의 해체와 한소 수교(1990년)는 북한에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전만큼 정신적 지지와 원조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관개시설을 돌릴 석유가 부족해 농업생산이 줄어 기근이 일어났고 고난의 행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2022년 2월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미국 외식산업들이 잇달아 러시아에서 철수했습니다. 짝퉁 햄버거로 대리만족하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러시아인들의 불만은 살아있을 것입니다.

고르바초프의 희망과 달리 동유럽의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과 북유럽 국가들이 나토에 몰려갔습니다. 한 나라가 공격받으면 회원국 모두를 공격한 것과 같다는 안전보장이 있기 때문이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나토 가입 움직임 탓이라고 합니다.

시대를 선도하는 지도자가 있어 동유럽은 다시 태어나 번영을 구가하고 그중 폴란드는 우리 방산 무기를 천문학적 규모로 구입합니다. 북한은 이웃에 좋은 세계관을 지닌 국가 리더가 없다는 게 불운입니다. 낙관하는 현자가 세계를 만든다는 교훈을 실현할 사람이 없는 것이죠.

소련이 민주화하여 동유럽을 민주화했듯이 중국이 민주화해야 북한도 민주화할 것 같습니다. 강박증으로 군비를 확장하는 북한을 비호하는 중국과 러시아를 보면 덩샤오핑과 시진핑, 고르바초프와 푸틴의 차이를 견주게 됩니다. '신냉전이다'라고 거론되는 요즘 이들이 속한 클럽은 세계의 앞날에 뭘 기여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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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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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관찰자 (175.XXX.XXX.167)
깊은 통찰이 담겨 있는 글입니다. 잠시 잊고 있었던 탈냉전의 파노라마를 다시금 보게 됩니다. 요즘 신냉전의 위기가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 철의 장막 속에서도 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위대한 족적을 볼 수 있었으며, 가깝게는 자유민주주의가 소수 인간부류들에 의해 한순간에 산화될 수 있는 위험도 지근거리에서 지켜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지만 진실을 보는 눈만큼은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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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0 11:16:09
2 0
김영환 (222.XXX.XXX.93)
너무나 감격적이었고 기뻤습니다. 또한 부러움 속에서, 무력감을 갖던 시대였습니다. 우리에겐 좀 더 큰 것을 이루지 못한채 황금기가 아쉽게 흘러갔습니다. 독일통일을 불안한 마음으로 기대하며 유치원 비의 유료화와 물가를 걱정하던 동베를린 젊은 주부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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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1 14:13:47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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