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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와 필기구의 헤게모니(2)
박종진 2022년 10월 04일 (화) 00:05:28

페니키아는 지금의 레바논과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일부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입니다. 지리적으로 메소포타미아문명과 가까워 언어와 종교는 비슷했지만, 수많은 민족이 치열하게 경쟁하던 내륙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항해술이 뛰어났던 이 사람들의 관심은 바다, 즉 해상 무역이었습니다.

손재주가 좋은 페니키아인들은 돛이 달렸지만, 보통 사람이 노를 저어 움직이는 갤리선을 만들어 탔고, 티리언 퍼플(고둥의 분비액에서 채취하는 염료)로 염색한 자주색 옷감이 가장 유명했습니다. 그밖에 이들은 삼나무, 채색 도기, 소금 등을 배에 싣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이런 좋은 물건을 갤리선에 싣고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그리스 등 페니키아인들은 어디를 가도 환영받았습니다. 그리고 물건을 사고 팔 때 점토판보다는 훨씬 가벼워 휴대가 편리한 파피루스와 읽고 쓰기 쉬운 문자를 만들어 갖고 갔습니다.

이 문자가 페니키아 문자입니다. 쐐기문자, 이집트 상형문자, 중국의 한자는 각 글자가 단어가 되기도 하고 음절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로 이 문자들을 읽으려면 상당히 많은 글자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22개 정도만 알고 있어도 거의 모든 것을 표현 할 수 있는 페니키아 문자는 쉽게 배울 수 있어 읽고 쓰기 편리했습니다. 이 쉽고 편리한 문자와 파피루스 조합은 지중해를 제패합니다. 그리스가 받아들였고 로마가 물려받았습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너무 어려워 이집트를 벗어난 적이 없지만, 이집트 출신 파피루스는 점토판을 쓰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지중해 전역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집트 역시 파피루스로 인한 독점적인 수입을 계속 챙길 수 있었습니다. 휴대와 보관이 편리한 것은 대단한 장점이었습니다.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쥐고 있는 남편과 서판과 첨필(stylus)을 들고 있는 아내 -로마시대  

기원전 3세기에 세워진 당시 세상에서 가장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70만권이 넘는 장서 역시 파피루스로 만들어진 책이었습니다. 참고로 당시의 책들은 지금과 같은 책이 아니었습니다. 양쪽에 막대가 달려 둘둘 말아 보관하는 두루마리였습니다. 지금과 같은 책은 기원후 1세기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5세기경 자리를 잡고 6세기부터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독점은 영원히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경쟁자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파피루스도 말입니다.

기원전 2세기 고대 그리스 도시 페르가뭄에서 도서관이 세워집니다. 전언(傳言)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한동안 장서(藏書) 경쟁 관계에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고대에 도서관은 정보의 보고(寶庫)였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도서관으로 몰려들었고 도서관이 있는 곳엔 인재들이 넘쳐났습니다. 도서관은 인재를 모으기 위한 국가 산업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런 장서 경쟁은 이해가 갑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계속 주도권을 갖고 싶어 했을 것이고, 페르가뭄 도서관은 주도권을 뺏고 싶었을 겁니다. 이 경쟁의 정점에 양피지가 등장합니다. 먼저 공격을 한 것은 이집트였습니다. 이집트가 페르가뭄으로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한 것입니다. 페르가뭄 역시 이 공격에 가만히 당하고 만 있지 않았습니다. 오래전부터 가죽에 글씨를 써오던 것을 생각해 냈고 석회용액에 담고, 털을 밀고 잡아당긴 다음 경석(輕石)으로 문질러 매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양피지는 질기고 부드러워 훌륭했지만 무척 비쌌습니다. 페르가뭄이 양피지 때문에 이집트와 주도권싸움을 계속할 수 있게는 되었지만, 그 비싼 값 때문에 양피지가 파피루스를 누르고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입니다.

양피지가 주도권을 잡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은 책이었습니다. 기원후 1세기부터 글이 쓰인 면들을 하나로 묶어 꿰맨 현대의 책의 원조 격인 코덱스(codex)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코덱스는 두루마리가 원하는 내용을 찾아보려 할 때마다 펼치고 감아야 하는 과정 없이 펼칠 수 있었고, 양면에 글을 쓸 수 있어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이 편리하고 실용적으로 정보를 담는 방법은 두루마리를 밀어내기 시작했고, 질기지 않아 꿰매기 어렵고 접은 면이 쉽게 끊어지는 파피루스 역시 기원후 500년경이 되면 양피지에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나 양피지 역시 기원후 1056년경이 되면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종이와 스페인에서 만나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에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됩니다. 종이는 훨씬 싸고 가볍고 책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질겼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1450년대 서구에 등장한 인쇄술은 종이가 없었으면 꽃도 피지 못하고 사그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현대 아직은 종이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요사이 몇 년을 보면 종이가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하철에 그 많던 종이신문이 사라졌고, 책 역시 전자 출판이 등장했습니다. 화폐 역시 종이 돈보다는 카카오페이 등으로 주고받는 세상이 왔습니다. 종이는 사라질까요?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제가 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역시 종이는 살아남았어! 하는 세상이 미래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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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견쓰기(1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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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rie (211.XXX.XXX.212)
아무리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고 아름다워도 결국 쉽고 편리한 도구가 널리 퍼져나가게 되는군요.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이 순리인가 합니다. 하지만 순리를 거스르고 살아남은 도구에 애틋한 마음이 가는 것도 인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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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6 17:38:19
0 0
박종진 (211.XXX.XXX.243)
순리가 없어지는 것 맞다면 순응 하는 것이 도리 이겠지만, 발버둥 쳐보는 것도 인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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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3 09:27:27
0 0
해랑달이랑 (175.XXX.XXX.13)
말씀하신 파피루스랑 양피지, 그리고 옛날 종이도 한번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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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4 20:17:06
0 0
박종진 (211.XXX.XXX.243)
당연히 생기는 관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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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5 08:04:41
0 0
영웅펠리칸 (175.XXX.XXX.32)
잘 읽었습니다.
동양에서 만들어진 종이가 서양으로 건너가 새로운 기슬들이 합쳐져 다시 전세계가 쓰고 있네요. 역시 최초로 만든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 되네요. 사람들이 만든 모든 것들이 다 그러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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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4 12:49:15
1 0
박종진 (211.XXX.XXX.243)
늦게 출발하여도 열심히 노력하는 자가 이기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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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5 08:04:00
0 0
Hola (118.XXX.XXX.207)
종이에 이어 전자책이 발달하고 있는데요, 이후에는 어떠한 새로운 것이 등장할지 기대됩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깔끔하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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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4 12:01:20
1 0
박종진 (211.XXX.XXX.243)
저도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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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5 08:02:49
0 0
서비당 (175.XXX.XXX.215)
언제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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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4 12:00:10
1 0
박종진 (211.XXX.XXX.243)
저도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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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5 08:02:15
0 0
조용한 관찰자 (175.XXX.XXX.166)
재미있는 글입니다. 세상의 발전에 대한 단면의 글이네요. 내용을 떠나 재미 있는 관찰을 해 봅니다. 제목은 대충 지나쳐 내용을 읽어보니 그간의 종이의 탄생과 위대한 업적에 대한 기술이었습니다. 공감합니다. 그런데 글 쓰신 분이 왜 이런 글을 쓰는가 궁금해서 봤더니 만년필산업에 관계되는 분이시네요. 그렇지요. 종이가 없다면 만년필은 골동품 이외에 어떠한 효용도 가질 수 없겠지요. 산업이 변해 가는 모습은 대개 발전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 아련한 향수를 만들면서 변해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이러니 합니다. 만년필과 종이가 영원이 우리의 곁을 지켜 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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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4 10:25:55
1 0
박종진 (211.XXX.XXX.243)
감사합니다. ^^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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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5 08:01:48
1 0
김봉현 (211.XXX.XXX.180)
말씀하신 것처럼 저 역시도 오프라인에서 문자를 기록하기에 가장 좋고 익숙하며 매력적인 종이가 앞으로도 오래오래 우리 곁에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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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4 08:41:11
1 0
박종진 (211.XXX.XXX.243)
종이는 아날로그 글쓰기의 마지막 보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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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5 08: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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